◎비상임이사제 도입 경영 견제케/대출단계 축소·기업신용 등급화/수신보다 여신·부실채권 더 신경은행들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1년간 옛 관행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협의체로 이루어지는 대출결정이 뿌리를 내리고, 은행의 지배구조가 비상임이사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은행장 1인 체제는 여전히 힘을 발하고 있으나 전횡을 막는 각종 장치가 마련돼 이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약화됐다.
대출을 결정하는데는 결정과정의 단순화를 반영, 찍는 도장 숫자가 곧 바뀐다. 지금까지 대출을 심사하고 결정하는데 지점 행원에서 은행장까지 적어도 10개의 승인 도장이 필요했다. 일부 앞서가는 은행에서 이 도장 숫자가 곧 3개로 줄어든다. 지점에서 승인처리하면 본점 실무자가 심사하고, 바로 최종 결정권자의 결재를 받아 대출이 이루어진다.
결정만 신속해진 것이 아니다. 결정이 빠른만큼 여신 심사는 강화한다. 외환은행은 곧 기업신용평가에 점수제가 아닌 등급제를 도입할 예정이다. 등급제는 기업 신용을 8∼10단계로 나누고 기업의 재무상황, 업종전망, 거래현황등에 따라 종합 평가한다. 등급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겠지만 등급만 보면 그 기업의 신용상태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외국인이나 외국은행에서 오래 근무한 한국인, 비은행 금융권 출신 임원들도 한몫 하고 있다. 외환 조흥등 이런 임원들을 맞아들인 은행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신심사가 관행적인 행태에서 기본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새 임원들, 특히 외국인들은 여신 심사에서 항상 「논리」를 요구한다. 「왜 이 기업에 대출해 주어야 하는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경우는 이제 대출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출 세일」은 은행에서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말이다. 여태까지 은행들은 예금을 누가 많이 끌어오는가, 거액 고객을 누가 잘 관리하는가에 따라 영업점장들의 실력을 평가했다. 지점에서는 예금액이 조금 많다 싶으면 금리를 올려주는 「웃돈 주기」전략으로 예금주들을 끌어들이기 바빴다. 자금조달 사정이 나빴던 것도 이유가 됐다.
최근 대거 물갈이를 통해 영업점포에 나간 은행 지점장들은 은행 자금을 얼마나 「요령있게」 「많이」 빌려 줄 수 있는가를 고심하고 있다. 정부의 대출독려 때문만은 아니다. 대출이 은행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한다」는 사실을 은행 퇴출 이후 국내 은행들은 절감하고 있다. 은행 관계자는 『점포에 등급을 매기는 잣대가 수신 실적에서 대출 실적과 부실채권 비중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은행 지배구조도 50년 넘는 구태(舊態)가 깨지고 있다. 상업 한일 합병은행인 한빛은행, 신한은행등은 비상임이사가 중심이 되는 미국식 이사회제도를 도입키로 했다. 은행들이 앞다퉈 비슷한 제도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비상임이사와 상임이사가 3대 1 정도로 참여해 이사회를 구성, 경영전략과 정책을 결정하고 그 아래 집행 이사들이 이 전략을 실행하는 형태다.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비상임이사의 은행 경영참여 비중이 커지면서 「관치(官治)금융」 「은행장 1인 체제」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하지만 전문성과 현실감각을 갖춘 비상임이사들을 얼마나 발굴해낼지, 상임 비상임이사진의 갈등을 어떻게 줄일지가 관건이다. 은행들은 관행을 깨고 거듭나기 위해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김범수 기자>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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