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허기 어루만지는 글 쓰고싶어”/無에서 자신 시험해보고 싶어 7월 해외자원봉사지원 印尼로/‘작가는 작품으로 얘기’ 새기며 이제 다시 세계와의 화해향해 배밀이하는 심정으로 글쓸터『사람의 허기를 눈밝게 알아보고 어루만지는 손, 내가 쓰는 글이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그런 글을 쓸 수 있게 될까』. 중편소설 「그 집 앞」으로 제31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소설가 이혜경(38)씨. 그 해답을 구하던 이씨는 올7월 인도네시아라는 먼 땅으로 「덥석」 떠났다. 「그 집 앞」을 표제로 한 첫 창작집을 내고 얼마 후였다. 그는 지금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파견한 해외자원봉사 프로젝트에 지원, 자바섬 중부의 족자카르타에 있는 명문 가자마다대학교에서 한국어강좌 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가 쓰는 글이 과연 소설인가 하는 의문을 늘 가졌습니다. 단편 한 편 쓸 때마다 내 한계가 보였습니다. 작가라는 작은 기득권에 내가 너무 연연해 하는 것 아닌가…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거지요』. 이런 작가적 회의, 혼자 사는 삶의 구속없음이 모국어를 떠나보겠다는 「행동」을 낳았다. 작품 「떠나가는 배」에도 썼듯 『말이 마음을 어찌 전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바로 그를 누구보다 섬세한 언어의 무늬를 가진, 탄탄한 장인정신의 작가로 만들어온 동인이다. 이씨 특유의 촘촘한 말의 그물은 진창같은 현실에서 아름다운 서사의 집을 지어올린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지만 이씨의 이력은 특이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82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해 등단한 그는 이듬해까지 3편의 단편을 발표한 뒤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침묵에 빠진다. 그동안 고교교사, 출판사 직원, 여성월간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95년 일그러진 가족의 모습을 마치 자수를 하듯 섬세하게 그린 장편 「길 위의 집」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돌아온다.
가족, 집 이야기는 그의 소설을 일관하는 주제다. 수상작 「그 집 앞」은 「큰어머니와 어머니 두 어머니」를 둔, 소실의 딸로 태어난 주부의 이야기다. 역시 서출인 시어머니와의 불화, 청각세포가 죽어가는 병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로부터 멀어져가는 남편과의 「사막같은 서걱거림」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알코올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씨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사회 가족과 여성의 자기정체성의 의미를 묻고 답한다. 그가 내놓는 해답은 고독 속에서도 공생(共生)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섣부른 희망의 전언은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살아내리라』는 주인공의 다짐이 그렇다. 「자꾸 닫히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일 자신도 없지만, 내 안의 흙탕물을 가만가만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강물이 더 혼탁해지기 전에, 흐려진 제 몸을 스스로 씻어내려 목숨들을 품어 안는 강물의 사랑으로」.
수상소식을 들은 이씨는 『인도네시아로 올 때 막상 혼자 떨어져 있으면 써지겠지 생각했는데 잘 안됐다. 그러나 다시 나와 세계와의 화해로 나아가려는 안간힘, 꿈틀거려 배밀이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 대학은사 황순원선생의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는 가르침을 새기면서, 『카뮈처럼 자신의 말만큼 살려고 노력하고』,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같은 소설을 써보는 것이 그의 꿈이다.<하종오 기자>하종오>
□약력
▲60년 충남 보령 출생
▲78년 충남여고 졸업
▲82년 경희대 국문과 졸업·단편 「우리들의 떨켜」발표 등단
▲82∼83년 여수 중앙여고, 당진 송악고 교사
▲95년 장편 「길 위의 집」으로 제1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98년 소설집 「그 집 앞」출간
◎수상소감/“글쓰기는 겉과 속이 하나되는 길찾기”
지난 주, 제게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치렀습니다. 시험장에 몇몇 얼굴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을 만나서 까닭을 물었더니 『자카르타에 갔었다』고 대답하더군요. 자카르타… 그곳에선 데모가 한창이었고 제가 살고 있는 족자에서 자카르타까지는 그 애들이 탈 수 있는 탈 것으로 열네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지요.
그 애의 열정과 상심… 거기에 한 마디 말도 못 건넨채(물론, 인도네시아어에 서툰 탓도 있었지만요) 강의실을 나와 무성한 잎 그늘을 걷는데,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습니다. 도대체 말로써 무얼 할 수 있을까. 부자는 날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속절없이 굶어죽어가는 이 땅에서, 그 애가 느꼈을 노여움이며 슬픔에, 내 글썽이는 마음이, 그 마음을 담아낸다고 하는 말이, 무어가 될 수 있을까… 5분쯤 걸리는 거리를 두 배가 넘는 시간을 들여 걸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 애들을, 이 땅을 사랑한다는 걸. 하필 그 애들이고 이 땅인 건, 지금 제가 이 곳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만일 제가 알래스카에 있었다면, 얼음 덮인 풍경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며 펭귄을 사랑하느라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심했겠지요. 가녀린 목숨들, 힘차게 서지 못하고 잔바람결에도 쓸리는 목숨들, 그 약한 목숨들의 채 삭이지 못한 노여움. 그 중의 한 슬픔이 어느 날 문득 기억 속에서 떠올라 맴돌 때, 글썽이는 마음 하나로 되적으며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되새겨 보는 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 뿐이었습니다. 따뜻한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다가가 품어보지도 못한 채 두고두고 마음아픈, 그런 사랑밖에 배우지 못해 뒤늦게 적어보는 글이 문학이라는 과분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제게 사랑을 보여준 분들께 드리는 감사 못지 않게, 사랑이 얼마나 소소한 것으로 무너지는지 깨달을 수 있게끔 불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불화의 아픔은, 사랑할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제 마음의 이면을 깨닫게 해주었으니까요.
겉과 속이 하나가 되게 저를 키우고 싶습니다. 제 글쓰기가, 그에 이르는 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주신 이 큰 상을, 큰 기쁨과 더불어 큰 경책(警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게 경책을 내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부부관계의 위기담은 ‘그집앞’/심리묘사 뛰어나 만장일치 선정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총 11편. 심사위원회는 이미 안정된 중견이나 미지의 신인급보다는 목하 활동적인 소장파의 뛰어난 작품에 수여되어 온 최근 이 상의 관행을 먼저 확인하였다. 이 원칙 아래 심사위원회는 세 작가에 주목, 그들을 집중적으로 토의하였다.
공선옥의 「타관사람」은 떠돌이 노가다가 한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든 어느 타향 시골마을에 뿌리박는 과정을 포착한 단편이다. 공선옥문학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이후 작업을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나왔다. 김한수의 중편 「빈 수레 끄는 언덕」은 도시의 변두리시장을 터전으로 팍팍하게 살아가는 장터사람들을 냉철하고도 따뜻하게 그려내, 자칫 세태소설로 빠질 소재를 구원한 만만치 않은 솜씨가 돋보였지만 아직 그 유혹으로부터 훨씬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부부관계의 위기를 다룬 이혜경의 중편 「그 집 앞」은 최근 여성소설의 한 경향에 소속하는 듯 그로부터 의미있는 일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서녀(庶女)로 자라난 여주인공, 마음 깊숙히 정신적 내상(內傷)을 거느린 그녀가 노골적인 또는 미묘한 공격으로 그 상처를 덧내는 시어머니와 서서히 청력을 잃어가면서 연애시절의 사랑도 풍화하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맞이한 결혼생활의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심리적 치유과정을 섬세한 필치로 형상화한 이 중편은 잔잔한 감동을 은은히 자아낸다. 무릇 업고(業苦) 속에 유전하는 중생에 대한 웅숭깊은 연민을 바탕으로 우울한 부정을 단호한 긍정으로 역전시키는 작가의 인간학이 빛난다. 이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이혜경을 수상자로 선정하였다.<심사위원=金允植 李祭夏 崔元植>심사위원=金允植>
◎심사경위/작년 7월∼올해 9월 발표소설 397편 대상/이혜경·공선옥·김한수 최종후보 압축
제31회 한국일보문학상 심사는 97년 7월부터 98년 9월까지 국내 각 월간·격월간·계간·반(半)연간 문예지와 문화무크지에 발표된 기성작가들의 단편, 중편 및 장편소설 397편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심사위원들은 단행본등으로 별도 발표된 작품도 대상으로 삼았다.
예심위원으로 위촉된 문학평론가 황종연(동국대 교수) 우찬제(서강대 교수) 진정석(서울대 강사)씨는 11월3일 모임을 갖고 대상작품 중 각 10편 내외를 추천했다. 예심위원들은 중복추천된 작품을 우선 통과시키고 나머지 추천작 중 토론을 거쳐 11편을 추천작으로 뽑았다. 추천작은 공선옥 「타관사람」, 김영하 「바람이 분다」, 김한수 「빈 수레 끄는 언덕」, 박완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이순원 「해파리에 관한 명상」, 이혜경 「그 집 앞」, 조경란 「유리동물원」, 최성각 「부용산」, 최인석 「내가 사랑한 폐인」, 하성란 「양파」, 한강 「어느 날 그는」(이상 가나다 순)이었다.
본심위원 3명은 13일 한국일보사에서 심사위원회를 열고 예심추천작 중 공선옥, 김한수, 이혜경씨의 작품을 최종 후보작으로 압축해 토의한 끝에 이혜경씨의 「그 집 앞」을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문학상 연혁/68년 출범 국내 최고권위/작년부터 상금 2,000만원/현대문학 족적 고스란히
한국일보문학상은 상업성과 문단분파를 초월, 순수한 문학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엄정한 심사를 통해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 작품을 선정함으로써 권위를 지켜왔다. 한국일보문학상은 신문학 60주년이었던 68년, 당시로는 파격적인 10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한국창작문학상」으로 출범했다.
20회부터 명칭을 「한국일보문학상」으로 바꾸고 상금도 500만원으로 인상했으며, 30회가 되던 97년 상금을 2,000만원으로 대폭 올려 명실공히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거듭났다. 수상자와 수상작품의 면면은 우리 현대문학의 발자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하종오 기자>하종오>
□역대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1회 한말숙神(신)과의 약속
2회 방영웅달
3회 오유권一家(일가)의 몰락
4회 강용준狂人日記(광인일기)
5회 이문구長恨夢(장한몽)
6회 신상웅深夜(심야)의 鼎談(정담)
7회 정을병병든 지구
8회 이청준이어도
9회 유현종들불
10회 이병주亡命(망명)의 늪
11회 김문수肉芽(육아)
12회 김원일도요새에 관한 명상
13회 이동하굶주린 혼
14회 최일남홰치는 소리, 세 고향
15회 윤홍길꿈꾸는 자의 羅城(나성)
16회 김원우佛面獸心(불면수심)
17회 임철우아버지의 땅
18회 윤후명섬
19회 서정인달궁
20회 이제하狂畵師(광화사)
21회 박태순밤길의 사람들
22회 이인성한없이 낮은 숨결
23회 김영현저 깊푸른 강
24회 하창수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25회 이창동鹿川(녹천)에는 똥이 많다
26회 신경숙풍금이 있던 자리
27회 구효서깡통따개가 있는 마을
28회 김인숙먼 길
29회 전경린염소를 모는 여자
30회 성석제유랑
윤영수착한 사람 문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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