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검찰 추락하다(문민정부 5년:64)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검찰 추락하다(문민정부 5년:64)

입력
1998.11.14 00:00
0 0

◎李健介 반발에 金泰政 눈물로 만류/청와대 “검찰간부 3명 옷벗기고 수사하라” 지시/李健介 청와대 항의전화·신문조서에 ‘비장한’ 메모/후배 검사 “고 검장님 이런다고 뭐가 남습니까” 설득『당신들 정말 이럴거요. 이런 식으로 나를 때려 잡으려 한다면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소』

『말씀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만…』

95년 5월 하순.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은 이건개(李健介·현 자민련 의원) 대전고검장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정덕일(鄭德日)씨에게서 돈을 받은 혐의로 친정인 검찰의 소환통보를 받은 이고검장은 청와대 김영수(金榮秀) 민정수석과 최후의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전화를 끊은 김수석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을 다시 찾아갔다. 『그 양반 현직 고검장인데 검찰에 대한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사표를 받고 끝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YS는 창밖만 바라볼 뿐 김수석의 진언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김수석의 회고. 『이고검장이 억울하다며 항의전화를 했어요. 하지만 내가 어쩌겠습니까. 사실 이고검장은 YS하고는 나보다 먼저 인연을 맺었고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어요. 검찰도 이고검장을 구명하려고 애를 썼고 나도 잘 풀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YS는 이걸 묻어두면 검찰이 성역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YS는 나에게 검찰도 성역이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말이 스스로에게 굴레가 된 거예요. 봐주고 싶어도 아무 말 못했을 겁니다』

5월27일 오후 3시35분 이 고검장이 서소문 대검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래 검찰총장감으로 물망에 오르던 이고검장의 출두. 검찰은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출두한 이고검장의 모습에서 「피사체(被寫體)」가 된 검찰의 현위치를 실감해야만 했다.

이고검장은 수사관들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12층 황성진(黃性珍) 중수 2과장실로 올라갔다. 중수부 과장 4명 모두 자기 손에 선배의 「피」를 묻히는 악역을 꺼려했지만 결국 한 번도 같이 근무한 적이 없는 황과장이 주임검사로 낙점된 것. 1시간쯤 후 신건(辛建) 법무부차관과 전재기(全在琪) 법무연수원장이 잇따라 검찰에 출두했다. 청와대에서 『옷을 벗기고 수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검찰 최고위간부 3명은 이미 사표가 수리된 상태였다.

황과장은 이고검장이 들어오자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고검장님 황성진입니다』

이고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검장님 죄송합니다만 몇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조사하는 황과장이나 조사받는 이고검장이나 서로 눈길이 마주치길 원치 않았다. 전무후무한 고검장 조사. 평소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검찰조사실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조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고검장은 정덕진씨에게 롯데빌라 매입자금으로 금품을 받은 사실은 시인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빌렸을 뿐 뇌물은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이 고검장의 이야기. 『해도 너무했어요. 고검장인 나를 흔들면서 장관이고 총장이고 전화 한통 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해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거지요. 검찰은 나를 여론재판에 회부했어요. 조사하기도 전에 피의사실을 흘려 죄인으로 만들었던 거예요. 왕이 특정인을 광장에 매달아 놓고 「죽여라」고 외치면 모여있던 군중들이 돌팔매질을 하는 식이었죠』

이 고검장은 자신이 무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황과장에게 『이 사건은 정씨의 진술에 의존해 시작됐다』며 『검찰이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수사일화 한토막. 이고검장은 조사를 받는 와중에 『하루만 외출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또 계속해서 외부로 다이얼을 돌렸다. 황과장은 난감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김태정(金泰政·현 검찰총장) 중수부장이 나섰다. 김중수부장은 황과장의 방에 들어오자 마자 이고검장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선배님,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직을 살리기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걸…』

김중수부장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마디로 읍소작전이었다. 김중수부장의 사석에서의 회고. 『사실 우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이고검장의 예전 모습을 생각하고 검찰의 처지를 떠올리니 저절로 눈물이 납디다. 눈물이 약이 됐던지 이고검장도 누그러지는 것 같았어요』

이고검장이 출두할 무렵 은진수(殷辰洙) 검사는 정덕일(鄭德日)씨를 판사앞으로 데려가 공판전 증인신문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미 검찰은 이고검장의 사법처리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은검사) 『이건개 고검장이 4월24일 증인을 만났을 때 무슨 얘기를 했나요』

(정덕일) 『힐튼호텔에서 만났는데 검찰이 자신을 내사하고 있다고 했어요.제게 빌린 5억원은 당시 옆자리에 있던 조성일(趙成一)씨가 빌린 것으로 해 달라며 저더러 두 세달 피해있으라고 하더군요』

스르륵. 입회서기 앞에있는 녹음기가 돌아갔다. 이 고검장의 운명을 가름하는 진술이 결정적 「증거」로 녹취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훗날 「공판전 증인신문절차」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받는다)

은검사의 이야기. 『정덕일이 사건이 터지자 꽁꽁 숨어버린 것도 따지고 보면 이고검장이 입막음을 했기 때문이었어요. 검찰에 들어가면 구속된다고 하니 잔뜩 겁을 먹은게 당연하지요』

이 고검장의 조사가 이뤄지던 시각 신차관과 전연수원장은 다른 중수부 과장 방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씨 형제에게서 금품수수 발언이 나오지 않아 이들과의 친분관계에 대해 해명성 진술서를 쓰는 선에서 가볍게 마무리됐다. 조사는 오후 9시께 일찌감치 끝났지만 귀가시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검찰관계자의 회고. 『오자마자 나가면 언론에 「해명성 조사」라고 두들겨 맞을 것이 뻔하잖아요. 밤새 진통을 겪는 모습을 보여야 여론도 수그러들테고…』

결국 두사람은 무료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날 오전 9시30분께 구내식당이 있는 별관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으로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들은 정씨 형제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두사람 모두 정덕진씨와 20년 이상의 친분이 있었다. 전연수원장은 서울지검 특수부검사로 있을 때인 77년 속리산관광호텔 카지노사건으로 정씨를 구속하면서 주임검사와 피의자로서 인연을 맺었다. 친분이 유지된 결정적 계기는 전고검장의 동생문제였다. 정씨는 87년 전고검장의 동생을 서울 팔레스호텔 슬롯머신 지배인으로 채용했고 그는 일명 「전차」로 불리며 정씨의 측근이 된다. 신차관은 74년 영등포지청 검사로 재직할 때 고교동창을 통해 정덕진씨를 소개받았다. 신차관과 정씨의 부인이 전주출신 동향(同鄕)이란 점때문에 정씨 일가와 자연스런 친분관계가 유지됐던 것.

이고검장 조사는 자정께 마무리됐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누운 이 고검장은 머리속에 만감이 스쳐가는 듯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하지만 황과장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다. 정상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이고검장이 혹시 극단적인 「돌발상황」을 일으킬지 염려됐기 때문. 특조실에는 쇠창살이 설치돼있지만 과장실은 무방비였다.

다음날 동이트자 이고검장도 직감적으로 운명을 예견했다. 구속영장이 작성되고 있는 동안 이고검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피의자 신문조서 용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고검장님, 이런다고 뭐가 남습니까. 제발…』.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이고검장은 황과장의 만류로 메모지를 양복주머니에 구겨넣으며 분을 삼켰다.

메모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YS에 대한 직격탄이 담겨있었다거나 자신의 검찰에 대한 공로를 적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고검장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닫았다.

고검장 구속은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본인은 강력히 부인했지만 검찰은 덕일씨의 진술과 계좌추적 결과만으로 영장을 청구했다. 홍준표(洪準杓) 검사가 전해준 영장청구와 관련된 일화. 조사가 끝나갈 무렵 검찰총장실에 중수부 과장들과 홍·은검사등 수사팀이 모였다. 박종철(朴鍾喆) 총장이 창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정도 진술과 증거 가지고 되겠습니까. 청와대에서 따지면 어쩌지요』. 박총장은 마지막까지도 「구속」이라는 극약처방은 피하고 싶어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정적을 깬 것은 홍검사와 은검사. 이때 잠자코 듣고 있던 김도언(金道彦) 대검차장과 김중수부장이 쐐기를 박았다. 『총장님 걱정마십시요. 청와대에서 법률적으로 뭘 안다고 미주알 고주알 따지겠습니까. 대통령이 물으면 무조건 증거가 있다고만 하십시요』

슬롯머신 사건의 길고 긴 여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고검장의 영장이 발부된 5월28일은 불기 2537년 「부처님 오신날」이었다.<이태희 기자>

◎말많았던 李健介 재판/검찰 ‘파생이자 뇌물’ 2중기소에 “정씨에게 받은돈은 빌린것 금융이익 만큼만 뇌물이다”/1심 알듯모를듯한 판결

이건개씨는 검찰내의 「황태자」로 불릴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그의 부친은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은인인 이용문(李龍文) 장군. 이씨는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거쳐 63년 사법시험 1회에 합격한 뒤 박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청와대사정담당 비서관 등을 거쳐 71년 수도치안의 총수인 서울시경국장에 발탁됐을 때의 나이가 31세. 77년 검찰에 복귀해서도 대검 중수1과장과 공안부장 서울지검장 등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알아주는 공안통. 권부에 가까웠던 탓인지 이씨는 정치색이 짙었다.

그는 92년 대선때 YS를 적극 지원한 공신(功臣)으로 알려져있다. 광범위한 정보망을 가동해 YS의 「귀」가 됐고 서울지검장으로 선거사범 수사를 지휘하며 YS를 위해 뛰었다. 그가 「살생부」에 오른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이씨의 이야기. 『당시 나는 미운털이 박혀 있었어요. 상부에선 초원복집사건으로 김기춘(金淇春) 전 법무장관을 기소하라고 했는데 나는 반대했어요. 나를 아껴준 고마운 분인데 배신 할 수는 없었어요. 또 장차관들을 계좌추적해서 잡아넣으라는데 그러면 경제가 파탄난다고 반대했어요. 청와대에선 이건개가 말을 잘 안듣는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런 일들때문에 고검으로 밀려났고 그때부터 YS와의 인연은 끊긴 겁니다』

초일류 변호사들로 구성된 이씨의 변호인단은 치열한 법정투쟁을 벌였다.

검찰은 이씨가 빌라대금 명목으로 빌린 5억4,000만원을 차용을 위장한 뇌물로 보고 특가법(뇌물)으로 기소했다. 그런데 검찰의 공소장은 이중으로 돼 있었다. 「돈을 빌리는 행위」자체를 뇌물로 기소하면서 빌린 돈에서 파생된 금융이익 만큼만 뇌물로 인정하는 형법상 뇌물죄를 「예비적 청구」로 해 놓은 것. 홍검사의 이야기. 『이중기소는 재판부가 형량이 적은 예비적 청구를 낙점할 수 있도록 검찰이 배려한 것이었어요. 특히 「금융이익 상당」이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재판부가 추징금을 정하기가 애매해 지지요. 내가 「그럼 이자를 꼼꼼히 계산해 확실하게 하자」고 했더니 수뇌부에서 「그 정도 했으면 됐지않느냐」고 달래더군요』

이씨의 측근인사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봐주려고 했다는 건 천만의 말씀이에요. 예비적청구는 어떻게든 잡아넣겠다는 뜻이에요. 유죄에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1심 판결의 승리자는 없었다. 법원은 『정씨에게 받은 돈은 빌린 것』이라며 검찰의 주청구를 기각했다. 대신 금융이익 만큼만 뇌물로 인정했다. 알듯 모를듯한 판결이었지만 법률적으로는 엄연한 유죄였다.

말많던 당시 재판에 대한 4인 4색의 반응. 당시 재판부의 얘기. 『이고검장이 명함에다 차용증을 써 주었는데 그게 결정적이었어요. 이씨가 평생 검사를 할 것도 아니고 변호사가 된 뒤 정덕일이 차용증을 내밀며 달라고 하면 꼼짝없이 줘야할 돈이지요. 정씨 형제가 어떤 사람들인데요』

수사팀의 설명. 『정씨는 한번도 돈을 갚아달라는 이야기를 안했어요. 사실상 그냥 준 거지요. 사건이 안터졌으면 영원히 묻혀졌을 돈입니다』

이고검장의 이야기. 『나는 하늘을 향해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당시 동문후배였던 모 기자가 롯데빌라를 사면 남는다며 돈은 자기가 사업하는 친구 정덕일에게 알아볼테니 롯데측에 말해보라고 했어요. 문제가 된 건 정덕진 아닙니까. 정덕일은 정당한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정덕일이 청탁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깁니다. 그 건으로 단 돈 한푼 이득 본 것이 없습니다』

다른 피고인의 변호사. 『솔직히 고전적 뇌물로 보긴 무리였죠. 개운치 못한 금전대여였어요. 세무서 직원이 차용증 써줄테니 돈빌려달라면 안 줄 기업인이 어디있습니까. 비슷한 경우죠. 이씨는 검찰에서 알아주는 거물아닙니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