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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가리기/박은주 문화과학부 기자(여기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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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가리기/박은주 문화과학부 기자(여기자 칼럼)

입력
1998.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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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명예회장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돌아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김정일이 아주 건강해 보였고, 어른에 대한 예의가 깍듯했으며, 목소리도 우렁찼다고 말했다. 분단 이래 그처럼 말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의 발언만 떼어 놓고 보면 그는 북한을 찬양했고, 김정일의 이미지를 좋게 말함으로써 나아가 이적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왜 북한에 갔는지 잘 알고 있을 뿐더러 그의 방북이 영 가망없을 것처럼 보였던 통일을 어쩌면 한 발짝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 최고의 부자 정회장이 빨갱이를 찬양할리 없다』는 확신이 그의 발언에 대한 시비를 용납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재력과 명성은 이미 「시비」 대상이 아닌 것이다.그런 「국민적 확신」이 없는한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제든 사상논쟁의 덫에 걸려들 수 있다. 최장집(崔章集)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의 논문 때문에 때아닌 매카시논란이 일고 있다. 모신문은 그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하고, 학계에서는 신문이 자의적으로 발췌인용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논란은 있지만 논증이 없다.

이화여대의 김활란(金活蘭)상 제정을 두고도 친일행적 시비를 들어 시민단체에서는 상 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시비가 일어도 학교에서는 공개토론회 없이 상을 계획대로 제정할 뜻임을 밝혔다. 진실과는 별개로 두 사건은 아(我)와 피아(彼我)간 힘의 논리에 의해 전개될 것이다. 사건은 결국 누가 잘못인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는 잊혀진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파워게임이다.

친일과 용공시비는 충치와도 같은 것이다. 결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고 통증을 줄 수 있다. 제대로 도려내지 않으면 더 상한다. 백일하에 드러내 정당히 평가하고, 치료해야 한다. 적당히 상처내고, 적당히 감싸는 식의 치료는 곤란하다. 그러나 먼저 충치가 있는지 진단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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