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발 자르기’ 결국 용두사미로/중소기업들만 IMF고통 신음/자율에 맡기지 말고 개혁추진을정부의 재벌개혁이 허구를 드러내고 있다. IMF 위기이후 정부는 경제의 구조개혁 차원에서 강력한 재벌정책을 추진했으나 결과는 재벌 비대화로 끝나고있다. 최근 관계 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5대그룹의 매출액이 국민총생산(GDP)의 72%나 차지한다. 이는 지난해보다 무려 16%포인트나 증가한 것이다. 현대와 삼성의 올 매출계획은 각각 80조원을 넘어 정부예산 75조원을 크게 상회한다. 재벌의 사업규모가 정부 규모보다 커진 것이다. 더구나 5대재벌은 자금시장을 독식, 회사채 발행물량의 80%이상이 이들에게 배정되었다. 향후 재벌의 비대화를 가속화하는 돈줄을 완전 장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재벌개혁은 우리경제가 회생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동안 재벌기업들은 정치권력과 공생관계를 맺으며 갖가지 특혜로 컸다. 건전한 투자나 정당한 영업활동보다는 시장 독점이익이나 부동산 투기이익을 챙기는데 몰두했다. 나아가 금융기관을 사금고처럼 이용하면서 문어발식 확장에 열중했다. 이런 상태에서 경제가 개방되고 무한 경쟁시대가 되자 재벌기업들은 스스로 몸집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공룡이 되었다.
새정부는 출범직후 재벌총수들과 ▲상호지급 보증해소 ▲경영 투명성 확보 ▲재무구조 개선 ▲핵심 주력사업선정 ▲책임경영 확립 등 5대 개혁안에 합의하고 강력한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합의내용은 재벌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는 매우 전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재벌의 반발이 조직화하면서 사실상 개혁은 용두사미가 되었다. 재벌개혁의 요체는 계열사의 정리이다. 문어발식으로 지배하고 있는 계열사들을 과감하게 정리해야 사업구조, 부채구조 그리고 경영구조를 획기적으로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한 빅딜정책이 흐지부지됨으로써 재벌개혁은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
빅딜정책에서 정부의 결정적인 잘못은 구조조정을 재벌 자율에 맡긴 것이다. 그 동안 추진된 빅딜은 재벌들이 부실회사를 떼어내어 단일 법인을 만들고 정부지원을 끌어내어 퇴출을 막아보자는 전략밖에 안 된다. 그나마 재벌기업들은 독립법인의 경영주체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 결국 빅딜이 합리적 재벌 구조개혁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회생시켜 사세를 확장하려는 영토싸움으로 전락했다. 대우, 현대 등 일부 기업들은 기업을 확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정부가 연말까지 기업구조개혁을 마무리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재벌개혁 논의는 사실상 꼬리를 감추고 있다.
재벌에 대한 개혁이 물건너 가면서 IMF위기의 고통은 중견기업들과 중소 기업으로 집중되었다. 이들 기업들이 지금처럼 계속 쓰러지면 5대 재벌의 비중은 더욱 커지고 경제력 집중은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어설픈 금융개혁이 금융기관들의 생존 불안을 야기하면서 재벌 이외에는 자금지원을 중단하거나 회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새정부의 개혁정책 역시 재벌에게 재벌불패 신화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현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정부의 개혁의지 회복이다. 재벌개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재벌개혁을 자율에 맡길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 회복차원에서 윈칙을 만들고 법과 제도로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특히 개혁이 경제불안을 가중한다하여 섣불리 부양정책으로 선회할 경우 경제는 방향감각을 잃는다. 이는 마치 환자에게 수술을 하다가 불안하다 하여 수술부위를 덮고 마약을 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경제가 필요한 재벌개혁은 문어발식 사업구조를 뜯어고쳐 전문계열화를 추진하는 일, 재무구조를 개선하여 부도위험을 줄이는 일, 지배구조를 개편하여 족벌경영체제를 타파하고 소유를 분산하는 일 등 사실상 재벌체제의 해체를 의미한다. 정부는 나라를 살린다는 차원에서 획기적이고 실현 가능한 재벌개혁안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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