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쿠크(1808∼1892)는 현대 여행업의 할아버지로 불린다. 19세기 산업혁명의 바람속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일이 끝나면 독한 술로 피로를 달래는 것이 일과였다. 이때문에 알코올중독자가 늘어나 사회문제가 됐다. 자본가들은 금주운동을 펴는 한편 노동자들에게 홍차 마시기를 권했는데 쿠크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사람들이 홍차를 즐겨 마시게 된 한 배경이다.■1841년 금주협회 임원회의에 참석한 쿠크는 금주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단체로 묶어 기차여행을 시키면서 도중에 홍차를 대접하고 음악도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이같은 계획을 발표하자 570명이나 신청을 해왔다. 쿠크는 이들에게 1실링씩 받고 레스터에서 19㎞ 떨어진 라파라까지 9량편성의 기차로 실어 날랐다. 쿠크의 여행업이 자리잡은 것은 1851년 런던, 1855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때였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1865년 아들과 함께 「토머스 쿠크 앤드 손」이란 여행사를 차렸다. 쿠크의 성공은 뛰어난 창의력과 함께 황소같은 추진력이 바탕이 됐다. 현대그룹의 금강산관광 성사도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표현처럼 정주영명예회장이 「황소같은 분」이 아니었으면 어려웠다는 평이다. 정명예회장이 금강산관광사업에 매달린 것은 89년부터인데, 그당시로는 엉뚱하다고 할 이 사업이 성사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쿠크의 성공은 두 박람회가 기폭제가 됐지만 현대 금강산관광의 성공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보증과 정명예회장의 황소같은 추진력이 얼마만큼 효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측은 18일께 첫배를 띄운다고 한다. 신변보장등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기대도 크다. 금강산관광을 성사시킨 정명예회장의 뚝심이 앞으로 북한사회 개방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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