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개혁이 가장 더딘 곳으로 재벌을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부채감축은 제자리 걸음이고 빅딜은 쳇바퀴만 돌리더니 이젠 산하연구기관을 통해 개혁정책에 노골적 반기까지 들고 있다. 이 시대 절대선(善)인 개혁에 반대하는 재벌은 경제사회적 악(惡)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그런 재벌(현대그룹)이 분단 반세기 동안 그 누구도, 정부나 강대국, 어떤 국제평화기구조차 트지 못했던 남북교류의 물길을 텄다. 1,001마리 소떼를 앞세워 휴전선을 넘고, 눈감기 전 금강산이나 다시 한번 보고 싶다던 실향민의 한맺힌 소원을 풀어주었으며, 북한 최고통치권자까지 만나 통일의 기대감까지 한껏 부풀려 주었다. 이 재벌은 국제통화기금(IMF)시대의 질곡에 허덕이는 모두에게 큰 희망을 던져주었다.
과연 어떤 것이 재벌의 실체일까. 개혁에 제동을 걸어 IMF극복을 지연시키는 지탄의 대상일까, 아니면 분단의 벽을 허문 희망의 메신저일까. 빅딜에 가장 소극적이었고, 이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가장 반개혁적으로 지목됐던 바로 그 재벌이 남북의 영웅이되고 정부로부터 찬사를 받는 상황에 국민들은 너무도 혼란스럽다.
그러나 선과 악, 두가지 모습 자체가 재벌의 실상이고 그 혼란 역시 오늘날 한국경제의 현주소다. 재벌의 양면성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이다.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재벌개혁이 어렵게 내디딘 통일의 첫발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남북경협의 성과가 개혁지연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개혁은 개혁대로, 남북교류는 남북교류대로 가야 할 문제다. 정부든 재벌이든,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이용하거나 희생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결국 두가지 전부를 놓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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