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맞교환 계속 거부땐 투자결정 잘못따른 문책 등 소액주주운동 타깃 될것우리의 경제위기는 해외에서 불어닥친 외환위기도 아니고 국내 은행이 취약해서 생긴 금융위기도 아니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기업, 특히 재벌그룹의 기존 구조, 관행, 전략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기업위기이다. 우리 경제는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산업정책과 재벌정책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는 기존 정책이 오히려 걸림돌로 바뀌고 말았다.
산업혁명의 초기단계에서는 부족한 자원을 동원해서 그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관건이고, 이를 위해서 영국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했던 정책은 자본 인력 등의 생산요소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배력을 가진 재벌그룹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가 선진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싸워 이기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새로운 관건이 된다.
경쟁력은 경쟁 속에서만 나온다. 한국 경제가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경쟁적인 시장이 형성되고 그 경쟁에서 이긴 기업이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 우리 재벌도 이제는 정부가 친 독점 울타리 속에서 왜곡된 승자가 되기보다 경쟁시장에서 공정한 규칙을 준수하며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겨야만 생명을 이어가고, 한국 경제의 선진화에 공헌할 수 있다.
재벌그룹이 새로운 시장 규칙과 제도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경영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관 제도 구조 전략 관행 등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구조조정이며 그 핵심은 사업구조 조정이다.
재벌그룹 입장에서 볼 때 사업구조 조정은 정성껏 키워온 계열사를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수반한다. 그러나 구조조정 대상 사업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계륵(鷄肋), 즉 먹기 어려운 닭갈비에 해당한다. 조조의 참모인 양수가 간파했듯이 계륵에 대한 정답은 「포기」이다. 재벌그룹이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평소에는 정리하기조차 어려웠던 계열사를 포기하고 특정 분야에 능력을 갖춘 전문화기업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오늘의 경제 위기는 하늘이 준 기회로 변할 것이다.
빅딜은 재벌그룹 자신을 위해서도 절실한 것이다. 재벌그룹이 빅딜 이외의 방식, 특히 객관적인 자산평가를 전제로 한 흡수합병으로 정리하게 되면 투자에 대한 손실규모가 명백히 드러나고, 이 과정에서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린 최고경영자가 감수해야 하는 피해는 엄청나게 커진다. 최고경영자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그룹경영에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 그발언권이 현저하게 약화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 몇 은행에서 보았듯이 최고경영자가 소액주주의 재산권에 대한 피해를 보상해야 할 수도 있고, 기아자동차에서 보았듯이 형사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에 빅딜은 재벌그룹 간에 부실요인을 안고 있는 사업들을 맞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사업의 내부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노출하지 않은 채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빅딜은 재벌그룹 경영자의 도덕적 해이가 또 다시 나타나는 잘못된 방식이다. 그러나 5대 재벌그룹의 총수가 가진 사회적 힘을 생각할 때, 이 정도의 도덕적 해이는 눈감아주어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면 빅딜을 대승적 자세로서 받아주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5대 재벌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은 빅딜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빅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혜택, 즉 잘못된 투자결정이 노출되는 경우에 짊어져야 하는 부담에 대해서는 그 동안 직접 경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반면, 빅딜을 통해 잃어버리게 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대 재벌그룹 최고경영자의 빅딜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앞으로 소액주주의 경영참여와 경영자의 잘못에 대한 사법적 처리가 본격화하면서 바뀔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업지배구조 도입과 소액주주의 주주권 회복은 한국 경제의 건강한 발전과 한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행정부와 사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국가적 과제이다.<서울대 교수 경영학>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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