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경제로 돈이 흥청망청 넘칠 때는 골짜기마다, 음식점마다 먹는 것으로 날을 지새우더니 거품 걷히고 생산기반 무너지자 문화가 돈된다 하여 문화에 몰려든다. 돈 맛을 보려고 문화에 몰려드는 꼴이 땅투기에 몰려들던 옛 모습을 보는 것같아 천박스럽다. 이 땅에 문화의 수난시대가 올 날도 멀지 않은 것이다.사실 삼십년 전만해도 한국하면 못살아도 예절과 의리와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나라,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살아있는 나라였다. 한국인하면 친절 정직 소박 검소 성실 근면이라고 하는 단어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었다. 마을마다 질박한 삶이 있었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염치를 알고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자기 욕심을 절제할 줄 알았다.
웬 하품나는 소리 작작하고 있느냐 하겠지만 공부하고 생각할수록 우리가 원래 가졌던 정신을 되살려 갈고 닦는다면 21세기를 보다 자신있게 맞이할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오명은 너무 많다. 「부패 공화국」 「거짓말공화국」 「퇴폐공화국」 「부실공화국」. 끔찍한 이름들이 붙어있다. 국제통화기금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한국에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정부든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국제적인 망신이고 국가의 신인도는 급전직하로 떨어져 있다. 한국의 부패지수는 바닥을 기고 있는 후진국의 그것과 맞먹는 사실도 천하에 알려졌다. 음란과 퇴폐가 극에 달해도 속수무책으로 있는 나라다. 건설 교육 기업 금융 전문가집단 어느 하나 부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제는 지도층이라는 말만 해도 시민들이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지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려면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지도층은 대체로 명예, 권력, 경제력, 사회적 힘 등을 가지고 있는 강자인데 이런 강자가 공동선을 위해 헌신해야 약자도 따를 것이며 사회가 건강해진다. 고관대작되면 치부하고, 감투만 하나 써도 부정을 일삼고, 돈 벌면 해외로 빼돌리고, 백 있으면 자식 군대빼기로 하면 누구도 이들을 지도층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권위가 생산되지 않는 사회는 썩는다.
흔히 서양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가 살아있다고 한다. 존경받는 사회 지도층에게는 도덕적 의무가 따른다는 것이다. 서양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삶에도 이 점은 무엇보다 강했다. 양반과 선비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칼을 들고 나섰고, 지휘관은 끝까지 싸우며 위험 앞에 먼저 몸을 던졌다. 온 가솔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나선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은 영의정 자손이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은 유림의 지도자였다. 어디 이 뿐인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선조는 많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공직자 숙정을 해도 공직자의 부패는 고하를 막론하고 갈수록 심해지고, 강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모두 독식하려 달려들고 있다. 여기에는 의리고 동료애고 체면이고 없다. 개혁이라는 이름 걸고 「정치사정」이니 「총풍」이니 하면서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한 결과는 결국 야당의원 빼가고 야당 총재 묵사발로 만든 것 이외에 남은 것이 없다. 국민의 국가관과 안보관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개혁도 필요하고 제2의 건국도 필요하지만 모든 것의 전제는 삶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삶에도 품위와 격조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이 시대의 올바른 전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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