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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투병 이형기 시인 ‘절벽’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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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투병 이형기 시인 ‘절벽’ 펴내

입력
1998.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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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티끌로”… 원숙해진 운명성찰/삶과 죽음의 경계 오가며 돌아본 유년·반추하는 역사/“시인은 죽지 않는다 은밀한 우리들 시간속에 항상 살아있지 않은가”「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우리 현대시의 한 명편 「낙화」의 시인 이형기(李炯基·65)씨. 94년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5년째 투병중인 이씨가 시집 「절벽」(문학세계사 발행)을 냈다. 49년 열여섯살에 「문예」지로 등단, 현대시사에서 최연소 등단의 기록을 세운 이씨. 「절벽」의 시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운명을 들여다본 그의 시선이 50여년 시력에서 우러나온 원숙미로 결정된 작품들이다. 이씨는 지팡이 짚고 집 부근을 산책하는 정도일뿐 나들이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투병생활에서도 시작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절벽」을 『죽음을 생각하고 쓴 시들』이라고 말했다. 서문에서 그는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풀어놓았다. 『시인의 사망기사에 속지 말아라. 이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의미있는 시인들은 모두 그대의 은밀한 시간 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 모든 존재는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존재는 시인이다』.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 그에 대한 성찰은 지난 해 사망한 시우 박재삼(朴在森)을 기리는 「이름 한 번 불러보자 박재삼」에서 보인다. 「그새를 못 참고/더구나 내게는 기별도 없이/가버린 너/순서부터가 틀리지 않느냐/평생 시만을 써온 너의 그 계산법은/나도 시를 쓰지만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모르겠다』면서도 「시인의 계산법」을 일러준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그것이 이제는/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또는 바람의 장미꽃이 되어/너의 무덤 위에 찬란하고나」.

투병중에 돌아본 유년의 기억, 역사에 대한 반추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한 허무롭고도 두려움 섞인 성찰로 이뤄진다.「병마용(兵馬俑)」에서 그것은 「이천삼백 년 동안 잠자다 깨어났다/깨어나 보니/그들이 지켜야 할 최고사령관/황제는 이미 한 줌 흙먼지로 돌아가/종적이 묘연하다」는 허망의 자각으로 드러난다. 심지어 「혼자 은밀하게 선언한다/­나는 멸망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미래를 믿지 않는 바다」중)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역시 시인의 계산법은 돌아가야 할 「집」을 마련해 놓았다. 이시인은 그것을 강심(江心)에서 본다. 모든 티끌이 씻겨나갈 수 있는 아름다운 자리, 그 곳에 그의 마음은 이미 가 있다. 시인의 집이다.

「나의 집은 흐르는 강물/그 먼 강심에 있다//크기는 넉넉한 두 평 단칸/들어앉으면 물의 흐름에/절로 손발이 씻기는 깨끗한 그 방/모래로 된 책도 몇 권 있다//별빛을 등불삼아 그 책장을 넘기면/위잉 위잉 후루룩 위잉/그렇다 그것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세상에서 가장 크게 울리지만/실은 침묵만을 낳고 마는/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그 소리 선연하게 들려오는/강심에 있는 단칸방/나의 집」(「나의 집」전문).<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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