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한나라당 이신범 조웅규 김영선 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13일부터 나흘간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의 인권담당 보좌관과 국제적 인권보호단체에 「판문점 총격공작 혐의」로 구속된 한성기씨등에 대한 안기부의 고문의혹을 호소하고 관심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아직 사실로 확정되지도 않은 일방적인 고문 주장을 미국관리들과 조야 인사에게 고자질하고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한 것은 국가 체통과 위신을 손상시킨 사대주의 행각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일단짜리에 불과한 이 기사가 수사기관의 통신감청 급증 현상에 대한 여야공방을 다룬 커다란 기사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여기에 우리 정치의 핵심인 「일관성의 결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나라당 의원들의 행태부터 따져 보자. 세계를 무대로 「인권운동」을 벌인 세 사람이 몸담은 한나라당은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문사건을 저질렀던 독재정권의 집권여당 세력을 모태로 한 정당이다. 투옥과 망명을 직접 경험한 바 있는 이신범 의원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리고 1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집권여당 소속이었던 사실을 벌써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인권 보호를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면, 「주먹과 구둣발로 때리는 고문」에 격분하기 이전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횡행했던 과거의 용공조작 사건과 숱한 정치적 의문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한나라당의 책임을 묻는 일부터 해야 앞뒤가 맞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욕하면, 도대체 누가 손톱만큼의 진실성이나마 인정해 주겠는가?
앞뒤가 어긋나기로는 국민회의도 다르지 않다.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말하면 언론에 보도된 「총격공작」 사건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건 관련자들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주장하는 중이고, 진상은 재판이 끝나 봐야 알 수 있다.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기 전까지 관련 구속자들을 「무죄로 추정」하는 것이 우리 헌법의 원리다. 국민회의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야당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만약 고문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것을 사대주의로 욕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집권여당은 야당의 세 의원을 비난하기 전에, 고문을 한 적이 없다는 안기부의 주장을 국민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안기부와 검찰은 과거의 숱한 조작사건 가운데 권력핵심과 직접 관련되었거나 집권여당에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만 골라서 터뜨리고 있다. 80년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때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를 공산주의자로 조작한 과거의 안기부와 검찰이 대학생과 재야인사 등 「보통시민」의 인권을 보호해 주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국민의 정부는 그 숫자와 정도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다른 고문조작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총격공작」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안기부 수사관들이 피의자들을 「차고 때릴」 권리는 없다. 안기부의 「고문」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총격공작」 사건을 그냥 덮을 수는 없다. 야당의 고문 주장에 날개를 달아주고 전혀 별개인 두 사건을 하나로 엮어준 책임은 집권여당에 있다. 과거의 숱한 「고문조작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단하지 않는 한, 안기부와 검찰 등 수사기관의 인권유린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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