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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형제와 YS(문민정부 5년: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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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형제와 YS(문민정부 5년:59)

입력
1998.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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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진 검찰서 “YS 도왔는데 왜이래”/장학로 실장 “선처” 전화했다가 宋지검장에 혼쭐/“칼국수 못줄망정 형무소 보내서야” 청와대에 탄원/“정치판 ‘오너’ 안다고 우쭐대다 망했다”때늦은 후회『띠∼ 띠∼』

『검사장님, 청와대 장실장이란 분에게서 전화왔습니다』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鄭德珍)씨의 내사가 시작된 93년 4월 말. 송종의(宋宗義) 서울지검장은 인터폰으로 전해지는 부속실 직원의 전갈을 받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실장? 청와대에 장실장이란 사람도 있었나」

송검사장은 마침 업무보고차 들어와 있던 한 간부가『받아 보시죠』라고 권하자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장실장)『청와대의 장학로 부속실장입니다. 서울지검에서 정덕진회장에 대해 수사중이라는데 사실입니까』

(송검사장)『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알아보고 있는 단곕니다』

(장실장) 『그양반 대선때 우리를 많이 도와준 사람인데 선처해 주실수 없겠습니까』

(송검사장)『(불쾌한 목소리로)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 검찰이 하는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대통령께 누를 끼치게 됩니다. 이만 전화 끝겠습니다』(딸깍).

장씨의 언사가 무례하다고 생각한 송검사장이 훈계조로 일침을 놓았던 것. 무안을 당한 장씨는 이후 일체 연락을 끊었다. 장학로씨가 정씨의 선처를 부탁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5월2일. 서울지검 특별조사실. 에메랄드 호텔에서 연행된 정씨는 홍준표(洪準杓) 검사에게 대뜸 쏘아붙였다. 『홍검사, 내가 지은 죄라곤 YS 대통령 되라고 도와준 것 밖에 없는데 날 잡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아』

『대선자금 말하는 겁니까. 한번 확 불어봐요. 내가 책임지고 (청와대와)붙어볼테니』

홍검사의 회고. 『정씨가 오자마자 대통령과의 관계를 들먹이며 저에게 겁을 주더군요. 밀리면 안된다 싶어 맞받아쳤지요. 그랬더니 쏙 들어가더라고요. 대통령과 정씨와의 관계는 듣고도 묵살했버렸어요. 믿기도 어렵고…』

송검사장도 『미주알 고주알 내게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정씨가 YS에게 돈을 준 것처럼 과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기억했다.

슬롯머신 사건은 유탄을 맞은 인사들 뿐 아니라 정씨 3형제에게도 시련과 배신으로 얼룩진 악몽의 기억이었다.

정씨 3형제와 YS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이었을까. 92년 6월 당시 강원도의회 부의장이었던 정씨 형제의 맏형 덕중(德重·60)씨는 동료 도의원이던 민주산악회 강원도지부 간부 장모씨와의 손에 이끌려 상도동으로 YS에게 인사하러 갔다. 덕중씨의 회고. 『대표 최고위원인 YS를 만난다는 것은 물론 기쁜일이지만 괜히 갔다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장씨가 워낙 진지하게 말해 허탕치는 셈 치고 따라 나섰죠』

『오셨수』 장학로씨는 정씨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몇분후 이층 응접실에서 YS가 모습을 나타냈다.『YS는 손수 녹차를 따라 주면서 상냥하게 대해줬어요. 이자리에 내가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더군요』

성질이 급한 덕중씨가 녹차를 단숨에 마셔버리자 YS는 또 한잔을 권했다. 감격한 덕중씨는 충성서약을 다짐했다. 『어르신을 뵙게 돼 영광입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심혈을 다해 심부름 하겠습니다』

상도동을 나온 뒤 일주일 쯤 지난 일요일 아침.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하던 덕중씨에게 상도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YS는 『양구 도의원 보궐선거전에서 야당과 민자당 후보가 백중세를 보이고 있는데 좀 도와주어야겠다』고 말했다. 충성심을 보일 절호의 기회를 잡은 덕중씨는 그길로 양구로 달려가 인근 지역 도의원들을 「응원부대」로 동원해 바람몰이를 했다. 결과는 여당후보의 턱걸이 당선. 이후 정씨는 강원도에서 이뤄진 서너군데 보궐선거에서도 열심히 뛰었고 운이 좋았던지 모두 여당후보가 당선됐다.

그로부터 5개월후인 92년 11월. YS가 대통령후보로 확정되자 덕중씨는 미국에 있던 막내동생 덕일(德日)씨를 선거운동에 끌어들였다. 정씨 형제들은 6·25때 월남한 실향민 출신.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이북5도민회와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덕일씨는 하얏트호텔 나이트클럽을 운영해 연예계에서도 「대부」로 통했다. 인천 민자당유세에서 YS가 덕일씨 소유 인천 뉴스타호텔에서 지역오찬모임을 갖게되자 덕중씨는 동생 덕일씨를 인사시켰다. 덕중씨의 기억. 『YS는 로비에서 동생을 만나자마자 「형을 도와주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고 나라를 돕는 것」이라며 반갑게 끌어 안았어요. 동생은 내가 YS에게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요. 이때부터 덕일이도 물심양면으로 YS를 지원했습니다』

당시 강원도에서는 국민당 정주영(鄭周永) 후보의 바람이 거셌다. 덕중씨의 말. 『민주계가 강원도에서 무슨 지지기반이 있었겠어요. 나는 비선조직으로 나름대로의 핵심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요. 우리는 강원지역 유세등에서 실향민과 연예인을 동원했어요. 동생 이야기로는 한 10억원 이상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인 93년 1월14일. 정씨 형제는 장학로 실장에게서 『세배 오시란다』는 연락을 받고 상도동을 찾아갔다. 『YS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라길래 「노모가 계신데 한번 청와대 구경을 시켜달라」는 것과 「6공때 처럼 슬롯머신 사업을 한다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또 앞으론 찾아뵙기 어려울 텐데 청와대에 연락할 라인을 하나 열어달라고 했더니 YS는 「앞으로 전화 자주 할 텐데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하더군요』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옷깃을 잡은 정씨 형제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3형제의 실질적 기둥인 둘째 덕진씨가 넉달뒤 검찰의 표적이 된 것. 덕중씨는 급한대로 청와대 장실장을 찾았다. 몇시간 뒤 장학로 실장이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 모습을 나타냈다. 장씨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그후 연락이 없었다고 덕중씨는 기억했다.

덕중씨는 이후 도의회 부의장 사임서와 함께 YS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동생일로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칼국수는 못줄 망정 형무소로 보내실 수 있으십니까. 선처해 주십시오」

탄원서의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정씨 형제는 덕진씨의 구속후에도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덕진씨의 측근 S씨의 증언. 『정씨는 수감된 후에도 YS의 지인(知人)인 J회장과 접촉해 YS와 독대를 추진할테니 변호사에게는 법정 변론에만 충실하라고 하더군요. 정씨는 법원에서 무죄나 집행유예를 받을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정씨형제가 YS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었다는 항간의 설은 사실일까. 덕중씨는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여운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지금와서 무슨 평지풍파를 일으키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YS를 한달에 두번꼴로 찾아가 독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뭐가 예쁘다고 강원도의회 부의장을 그렇게 대우해 주었겠어요』

정씨의 변호인이었던 송기방(宋基方) 변호사의 증언. 『정씨는 「국세청 세무조사로 다 끝난 건데 왜 재탕수사를 하느냐」며 억울해 했어요. 또 YS가 우리 형제들에게 이럴 수는 없다고도 했지요. 정씨 얘기를 100% 믿을 수는 없었지만 자기들에게 칼이 들어온 것에 대해 배신감을 토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YS의 최측근인 K씨 말은 다르다. 『나도 정씨 형제들을 알아요. 그 사람들은 돈은 있지만 명예가 없었던 「업자」였지요. 우리와의 인연은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유세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시작됐지만 선거자금을 받을 만한 깊은 관계는 아니었어요. 그사람들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죠.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사람들이니 대선때 유리한 쪽에 줄을 댄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겁니다. 선거와 설 때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한두명입니까. 만나주는게 예의지요』 덕중씨가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 『조상뿌리가 흔들리도록 얻어 맞고 나니 세상이 달라보이더군요. 대선공로로 청와대에 들어가 덕본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찬밥 아닙니까. 정치판에선 「오너」보다 주변의 힘깨나 쓰는 「실세」를 많이 알아두는게 유리한데 우린 그걸 몰랐어요. YS 하나 안다고 우쭐댔던 우리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거지요』<이태희 기자>

◎정덕진의 인생유전/고아원 생활에 껌·암표팔이/우연히 차린 오락실 대히트/카지노·슬롯머신 발판 마련/돈 매개로 암흑가의 황제로

「한국판 마피아 대부」,「밤과 낮의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

슬롯머신 사건 당시 검찰은 정덕진씨를 사업가로 변신한 조직폭력배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했다. 당시 부산 로열관광호텔, 서울 희전관광호텔등을 소유한 것은 물론 직간접적으로 국내 슬롯머신업계를 장악해 87,88년 국세청 고액납세자 46,47위를 차지할 정도였고 슬롯머신 업소가 조직폭력배들의 서식지 노릇을 했으니 검찰의 비유가 허풍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씨가 음지에서 「입신(立身)」하기까지 펼친 「뒷골목 편력」도 그를 잡아 넣은 홍준표검사의 인생유전 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정씨 일가는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6·25때 월남한 실향민이다. 수유리 가건물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정씨 가족들은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덕진씨가 동생 덕일씨를 업고 서울거리를 헤매다 찾아간 곳이 필동의 한 고아원. 슬롯머신 사건당시 정씨가 덕일씨를 구속하려는 검찰에 끝까지 맞선것도 덕일씨를 업어 키운 아들처럼 생각하는 각별한 정때문이었다.

그는 형제중에서도 머리가 비상했다. 동창생 S씨의 이야기. 『정씨는 서울사대부중에 수석으로 들어와 반장을 했지요. 고등학교 2학년때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퇴했는데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판·검사 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학교를 중도하차한 정씨는 생계를 잇기위해 명보극장 앞에서 껌과 암표를 팔기 시작했다. 대원호텔 오락실의「기도」생활도 거쳤다. 밑바닥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마침표를 찍었다. 모대학 Y교수가 청계천에서 취미삼아 허름한 오락기를 수제품으로 만들었는데 별반 재미를 보지 못하던차 소식을 들은 정씨가 찾아갔던 것. 정씨의 고난한 인생역정을 들은 Y교수는 선뜻 정씨에게 제품을 제공했다. 정씨는 청량리와 대왕천 부근에 소위 「토끼몰이」 오락실을 차렸다. 잡초같은 강인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오락실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정씨는 돈방석에 앉았다. 정씨의 사업은 「돈이 돈을 벌며」 커져갔고 70년대초에는 속리산 관광호텔 카지노까지 인수했다. 이를 발판으로 슬롯머신 업계에 진출한 그는 10여개의 호텔과 슬롯머신 업소를 잇달아 인수했다.

S씨의 이어지는 기억. 『「돈이 따라다닌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그는 절대로 번듯한 빌딩이나 호텔을 짓거나 사지 않았어요. 다 망한 것을 헐값에 인수해 나이트클럽이나 슬롯머신등 부대시설을 들여놔 근사하게 포장을 했어요. 그만이 가진 사업수완이었죠』

정씨는 과연 검찰이 지목한대로 조직폭력배의 배후세력이었을까. 정씨는 검찰에서 이승완 최창식 이강환 박종석등 주먹세계를 주름잡던 두목들과의 친교를 시인했다. 정씨 측근인사의 설명. 『정씨 자신이 깡패는 아닙니다. 깡패를 하려면 의리와 힘, 돈과 조직등 4박자가 맞아야 하는데 정씨가 가진 것은 머리와 돈이었죠. 사탕을 뿌려놓으면 개미떼가 몰려들 듯 정씨는 깡패들도 돈으로 해결했어요. 자본주의사회에서 「회칼」과 「돈」이 싸우면 돈이 이기는 것 아니겠어요. 돈을 매개로 서로 공생한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다고 보면 정확할 겁니다』

검찰 관계자의 이야기. 『우리나라에 진정한 조직폭력배는 없어요. 자기를 책임지고 부양해 주는 사람이 「오너」죠. 당시 슬롯머신업소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정씨 말이라면 목숨을 걸 수 있는 「잠재적」 깡패였고 그런 의미에서 정씨 자신도 암흑가의 황제라는 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거에요. 실제로 아무도 정씨를 못건드린 것도 사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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