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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찬양/오미환 문화과학부 기자(여기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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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찬양/오미환 문화과학부 기자(여기자 칼럼)

입력
1998.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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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게으름뱅이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구절로 기억되는 이 천재는 평생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생각하기를 즐겼다. 그의 철학은 평정과 휴식, 고독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좀 더 조용한 데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이사한 그는 거기서 20년동안 13개 도시로 24회나 이사했는데, 아침 11시 밖에 안 됐는데 깨우는 친구들을 피해서였다.

그런 그가 스웨덴 크리스티나여왕의 초청에 응한 게 잘못이었다. 당시 20세도 안됐지만 매우 총명하고 부지런했던 여왕은 하도 바빠서 새벽 5시에 철학을 공부하자고 했다. 데카르트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스웨덴으로 온 지 넉달만에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10년뒤, 여왕은 가톨릭으로 개종, 어느 날 갑자기 왕위를 버리고 로마로 가서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권력과 영광, 의무감에서 해방된 여왕은 그뒤 전처럼 바쁘지 않게, 삶을 즐기며 살았을 것이다.

생산성과 경쟁력을 가치판단의 으뜸기준으로 삼는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너무 한가해서 한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경제파탄으로 삶이 찌들리고 걱정만 늘어가는 때에 게으름타령이란 밥 빌어먹기 딱 좋은 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가쁜 숨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자.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어디로 가나. 정신없이 쫓기듯 사느라고 몰랐는데, 어느 날 문득 살펴보니 벼랑끝이라든가 제 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더라는 깨달음처럼 허망한 게 있을까. 구조조정으로 날벼락처럼 실직을 했거나 고생 끝에 겨우 살만해져 숨 좀 돌려볼까 했더니 몹쓸 병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시간을 다투며 열심히 지나온 세월이 모두 헛것이 됐다고 분통을 터뜨린다면, 그것은 거꾸로 그동안 헛살았음을 인정하는 화풀이일 수도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나무들은 머잖아 잎새를 떨구고 겨울채비에 들어갈 것이다. IMF의 긴 터널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결코 조급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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