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한파가 닥친 이후 우리는 구조조정이란 말을 날마다 듣고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은 경제 분야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도 시급하다. 한글날에 말과 글에 관한 시급한 구조조정 두 가지를 살핀다.첫째는 말에서 드러나는 발음의 혼란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국어 표준발음을 교육하고 있으나 우리 사회는 지금 비표준적인 발음, 사투리 발음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방송과 텔레비젼에서 마저 사투리 발음과 비표준 발음이 판을 치고 있으니 그 밖의 일상생활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게」와 「개」, 「세집」과 「새집」을 구별하여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요즘 유행하는 손전화(핸드폰) 중에는 모 회사의 「애니콜」이란 상표가 있는데 이 또한 잘못 표기되고 잘못 발음되는 예이다. 「애니」는 서양 여성의 이름은 될지언정, 「any」를 나타낼 수는 없다. 따라서 당연히 「에니콜」로 쓰고 읽어야 한다. 구태여 상표에 영어를 끌어다 쓰는 것도 생각할 일이지만, 이왕에 쓰려면 정확하게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뿐인가? 장단의 혼란도 극심하다. 『소년원에는 비행소년이 많았다』라는 말은 흔히 『소년원에는 비행기 타는 소년이 많았다』는 뜻으로 잘못 발음하는 이가 많다. 「비」를 길게 발음해야 행실나쁜 소년이 되는데 이를 짧게 하니 「비행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비표준 사투리 발음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이다. 발음을 듣고 그 출신지를 점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시급한 것은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의 혼란이다. 우리말에는 「발」과 「팔」이 있다. 그런데 만약에 「발」을 「팔」로 쓴다면 어찌될까? 말할 필요도 없이 「발」이 「팔」이 되니, 「발」이란 말은 아예 없어지고 「팔」만 남는 격이다. 그런데 현행 로마자 표기법은 바로 이러한 망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발」을 pal로 적고 「팔」을 p’al 로 적으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외국인은 두 말을 모두 「팔」로 발음할 수밖에 없다. p이건 점하나 찍은 p’이건, 이를 보는 사람은 모두 「ㅍ」으로 읽을 수밖에. 이러한 그릇된 표기법을 대한민국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라고 정해 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정부 당국의 안일한 자세가 한심할 뿐이다. 현행 표기법으로 「장녀」란 우리말은 로마자로 적는 순간, changnyo 즉, 「창녀」로 둔갑하고 만다. 남의 집 귀한 딸을 「창녀」로 만들다니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6·25 전쟁 중에 미군 조종사는 평안도 「정주」를 폭격하라는 작전 명령을 받았으나 그가 막상 폭격을 한 곳은 충청북도 「청주」였다. 물론 많은 미군과 국군 그리고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왜 이런 어이 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 비극은 바로 그릇된 로마자 표기법에서 비롯되었다. 조종사는 군사 지도에 나와 있는 Chongju(정주)와 Ch’ongju(청주)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점이 하나 있고 없는 것이 미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고 발음을 해 봐도 소리가 똑 같이 나니 혼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잘못된 표기법 때문에 많은 아군과 무고한 양민이 폭격 당하다니! 이거야말로 우리말을 완전히 파괴하는 표기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은 이른바 「맥큔라이샤우어」 표기법이라고 알려진 미국식 표기법과 같다. 그런데 바로 이를 만들어 낸 라이샤우어 교수는 10여년전 이렇게 토로하였다. 『일제 식민 치하에 있던 시기에 나온 이 표기법은 이제 자주 독립국인 한국의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부적절하다. 이제 한국어의 체계에 맞고 일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새로운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84년 군사정부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구실로 그 당시까지 25년 동안 공식안으로 사용해온 「문교부 표기법」을 버리고 다시 맥큔라이샤우어 표기법을 전격적으로 채택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보라! Jongju(정주)와 Chongju(청주)로 갈라 적었다면 미군조종사는 청주를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Jangnyo(장녀)는 Changnyo(창녀)가 될 필요가 없으며, bal(발)을 pal(팔)이라고 하는 망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학자들이 만들어 낸 문교부의 공식 표기법이었다. 더 이상의 국가적 손실을 막으려면 현행 로마자표기법은 하루 속히 개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을 살리는 길이요 진정한 국제화의 길이다.<대한음성학회회장>대한음성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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