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강당에 수백명이 종횡으로 정렬해 서 있다. 한결같이 굳은 표정에 부동자세. 국민의례에 이어 기관장의 일장훈시가 끝나자 직원대표가 앞에서 결의문을 낭독한다. 모두 오른손을 올린다. 곧바로 행사는 종료. 개회부터 폐회까지 걸린 시간은 10여분을 넘지 않았다」유신치하의 반공궐기대회 모습이 아니다. 5공시절 호헌결의대회도 아니다. 민주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민의 정부」 시대에 은행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풍경이다.
정부가 1단계 금융구조조정 완료를 선언한 지난달 28일부터 은행들은 앞다퉈 「클린뱅크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국민세금의 수혈로 우량은행의 토양이 생성된 만큼 이젠 은행이 신용경색타개와 경기활성화에 앞장서겠다고 공개선언하는 자리다.
뜻은 좋다. 그러나 10여분 남짓한 전시용 행사를 위해 아침 일찍 일선지점장들까지 불러모으는 그 낡은 모양새와 발상이 너무 한심하다. 더구나 소리높여 결의문을 외치고 클린뱅크를 선언하는 그 순간에도 은행들은 여전히 금리낮추기에 인색하고 돈을 빌리러 온 중소기업들을 퇴짜놓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클린뱅크이고 누구를 향한 결의문인가. 차분하게 대출문턱을 낮추고 이자율을 내리면 신용경색은 없어지고 경기는 살아날 것이다.
한 은행임원은 『솔직히 이런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제(官製)결의대회」였던 탓이다. 지난주말 재정경제부로부터 「권유」가 있었고 은행들은 부랴부랴 행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는데도 정부관리와 은행경영진의 발상은 예나 지금이나 어찌도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이달말엔 아예 체육관을 빌려 전금융권이 참여하는 초대형 전진대회를 연다고 한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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