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변화에 적응이 미흡할 때 위기가 온다. 그리고 적응 미흡의 정도가 클 때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환경변화에 적응하는데는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개혁속도의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적응기간이 짧은 것은 급진적 개혁, 그리고 긴 것은 단계적 개혁이 바람직하다.국회의원 수를 줄인다든가 정부규제를 철폐한다든가 하는 정치나 행정쪽의 이른바 비시장(非市場)부문개혁은 제도를 하루아침에 고쳐 밀어붙여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금융구조나 기업의 거래관행과 같이 가격기능에 의해 작동하는 시장부문의 개혁을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면 실효는 적고 부작용만 크게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추진하는 개혁은 속도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비시장부문의 개혁은 더 가속시키고 시장부문의 개혁은 좀 더 순리를 존중하여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먼저 현 경제위기가 개방의 속도조절 실패에 기인한다는 점부터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개방체제에 일찍부터 대비했더라면, 또는 개방이 20년 뒤쯤 왔더라면 오늘날 아시아나 한국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문을 열어준 과속개방은 취약산업의 붕괴와 국제투기자본의 교란을 유발하여 오늘의 위기로 치닫게 한 것이다.
그런데 위기에 대처하는 처방 또한 지나치게 과격하였다. 그동안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은 한마디로 말해서 되도록 많은 기업, 되도록 많은 금융기관을 되도록 단기간에 퇴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긴축정책과 30%의 초고금리정책을 썼으며 그 결과로 연쇄적인 기업도산과 감당할 수 없는 금융부실채권을 양산(量産)한 것이다.
금융부실에 대한 대응책도 그러했다.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은행들에 120조원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부실채권을 떠맡겼다. 그런데 은행이 보유한 주식가격평가손의 계상등 회계기준이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등 건전성기준을 당장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은행들의 엄청난 적자와 자기자본 잠식을 초래하였다. 결과적으로 은행부실을 신속하게 해결하려고 한 것이 은행을 더욱 철저히 부실화시키고 그에 따른 사회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이 크게 벌여놓은 꼴이 된 것이다. 일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차근차근 벌여가야 한다.
고용조정 문제도 그러하다. 고용조정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나 그것을 모두 하루아침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견딜만한 사업장은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하물며 정부가 주도하는 금융부문에서까지 한꺼번에 40%나 감원한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기업에 대해서도 지금 500%가 넘는 부채비율을 내년까지 200%로 줄이라고 한 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과속이다. 기업이 빚을 갚으려면 이익을 더 내든지 재산을 팔든지 해야 하는데 그 두 가지 길이 사실상 막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까지의 구조조정정책은 우리 경제가 견딜 수 없는 정도의 지나친 기업도산과 지나친 금융부실의 결과를 빚었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지나친 경기냉각과 과대실업을 유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수를 진작하여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병을 주고 약을 줄 것이 아니라 당초부터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순리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썼어야 옳았다. 이와는 반대로 속도를 다그쳐야 할 정치개혁과 행정개혁은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정치와 행정은 개혁속도를 가속하여 위기극복을 위한 개혁을 앞장서서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경제학>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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