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원서 변호사 입지전/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서/새로운 중도좌파 표방/야심위해 4번 결혼 비난도80년대말 한 젊은 의원이 만취한 채 독일 본 중심가에 있는 헬무트 콜총리 관저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꼭 거기에 들어갈 거야』
이 외침은 10여년만에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독일 북부 모젠베르크의 가난한 세탁공 어머니 밑에서 자란 유복자 게르하르트 슈뢰더(54). 자수성가형의 그가 「불패의 신화」 콜의 16년 아성을 드디어 무너뜨렸다.
1944년 4월 7일 그가 태어난 날 아버지는 없었다. 나치의 전사로 참전, 루마니아 전선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세탁공으로 일하는 어머니밑에서 4형제와 함께 가난으로 점철된 유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야망이 있었기에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도 야간학교를 다녔고 마침내 명문 괴팅겐 대학에 진학,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유년기의 불우함은 자연스럽게 노동자 혁명에 젖어들게 했고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사민당(SPD)에 입당했다. 78년 SPD 「유조스(젊은 사회주의자)」의장에 선출되면서 정치가로 입지를 굳힌 슈뢰더는 80년 하원의원 당선, 83년 하노버 지방의회의장, 90년 니더작센 주지사, 97년 SPD 총리후보로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이과정에서 그는 하나의 꿈 「정권장악」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치적 이념과 세계관 그리고 지지층을 바꿔왔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좌파의 대표적 보수주의자로 변신을 꾀했다. 그의 셔츠 컬러는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변해갔다.
그는 정치적 야망에 따라 아내도 바꿨다는 말을 듣고 있다. 좌파학생 운동이 뒤흔들 때 고교친구인 가난한 에바 슈바흐와 결혼했고 SPD에 입당한 뒤에는 정치운동의 동료인 안네 탄셴마흐가 아내였다. 하원 당선뒤 오랜 혼외 관계끝에 84년 딸 둘이 딸린 기혼녀였지만 슈뢰더의 정치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게 한 힐트루트 함펠과 결혼했다. 하지만 선거운동이 본격화한 지난해말 탄셴마흐와 이혼한 지 3주만에 20년 연하의 정치담당 잡지기자인 35세의 도리스 쾨프를 네번째 아내로 맞았다. 쾨프는 슈뢰더의 이미지를 관리하며 총선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입고 깨끗하고 세련된 매너로 사교계를 휘젓는 화려한 면모도 있는가 하면 캐주얼 복장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한 잔하는 소탈함도 있다. 사람들은 그를 「독일의 토니 블레어」로 부른다. 그러나 유럽통합에 소극적인 영국과 달리 슈뢰더는 「21세기 유럽의 슈뢰더」를 이미 예약했다.<배국남 기자>배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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