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다,200년전 국정보고서”/경비·수라상 반찬까지 상세기록/정조시대 통치투명·책임성 생생히기록은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투명성과 책임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폭군은 기록을 피해 역사의 어둠 속으로 숨고, 성군은 청사(靑史)의 기록자로 남는다.
서울대 한영우(韓永愚·국사학과) 교수가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효형출판 발행)을 냈다. 정조(正祖·1752∼1800)가 아버지 사도제자가 묻힌 수원 화성(華城)의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온 행차보고서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해설한 책이다. 한교수는 이 책에서 「통치자와 기록」이라는 앵글로 정조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결론은 「정조는 역시 성군」이라는 것. 한교수는 서문에서 『무섭다. 이렇게 철저하고 상세한 국정보고서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795년 윤 2월28일 정조의 명에 따라 설치된 의궤청이 제작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그 해 윤 2월9일부터 8일간의 화성행차를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행차의 총경비는 10만3,061냥.…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비)가 타고 갈 가마(길이 5척4촌·너비 3척5촌)를 만드는데 2,785냥이 들었고, 29개 분야 장인 120명이 참여했다. 출발일 묘정(卯正) 3각(오전 6시45분께) 왕이 돈화문까지 나와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홍씨는 궁 안에서 가마를 타고 영춘문 천오문 만팔문 보정문 숭지문 집례문 경화문 동룡문 건양문 숙장문 진선문을 거쳐 돈화문까지 나왔다…』.
빈틈없는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왕이 시흥행궁에서 첫 밤을 자고 받은 아침 수라상에는 밥과 국등 8가지가 올랐는데 젓갈그릇에는 전복젓 석화젓 조개젓 게젓등이 담겨 있었다…』. 화성에 도착한 뒤 베푼 경로잔치 기록은 참가자 389명의 연령별 분포를 모두 밝히고 있다.
책 앞부분 63쪽에 걸쳐 실려 있는 채색 수원행행반차도(水原幸行班次圖·정조의 화성행차 그림)는 책의 가치를 한층 높인다. 두루마리형태로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온 반차도를 고증을 통해 새롭게 채색, 공개한 것이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지도로 화원들이 그린 반차도에는 1,7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교수는 서울대 규장각관장이던 94년에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영인본을 낸 뒤 올해 회갑(7월)을 맞아 책을 완성했다. 한교수는 『왕조시대 기록정치의 전통만이라도 제대로 계승했다면 전직 대통령을 청문회에 세우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서사봉 기자>서사봉>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