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일 한국을 방문한 로만 헤어초크 독일대통령은 문화예술에 대한 애호와 존중으로 많은 화제를 남겼다. 그는 이 기간에 한국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음악회를 개최했고, 「21세기의 가치」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 청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그가 다른 일정 때문에 일찍 일어서야 하는 사정을 알고 있던 사회자가 중간에 인사기회를 주었으나 헤어초크대통령은 발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대통령이지만 문화 속에 있었으며 단상에서 문화를 내려다 보지도 않았다.그러나 한국의 대통령들은 문화 위에 군림해왔다. 『청와대에 가봤더니 벽에 제대로 된 그림 하나가 붙어 있지 않더라』는 말이 들릴 만큼 대통령들은 대체로 문화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대통령이 특정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간 일은 더러 있었지만 그런 1회적 행차는 오히려 관계인사들을 긴장시켰고, 문화예술계는 공연이나 전시의 본질을 왜곡·훼손하면서 대통령을 맞아야 했다.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할 때 가장 문화적인 분으로 알려진 김대중대통령에 대해 문화인들은 많은 기대를 했다. 6월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책으로 여는 세상」행사가 열렸을 때, 요즘 읽는 책을 질문받은 김대통령은 책 읽을 시간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차라리 다시 감옥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화인들은 그 말을 소중한 선물이나 위안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통령의 책사랑은 대단하구나, 문화진흥의지는 여전하구나」 하는 차원의 안심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아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문화와 문화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선거때의 공약은 집권후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과연 달라진 생각은 무엇이며 달라지지 않은 생각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열린 문화정책」을 표방한 국민의 정부가 문화산업을 21세기의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키로 한 정책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21세기의 문화청사진은 어떤 그림인지 알고 싶어 한다. 특히 10월의 방일을 앞둔 시점에서는 일본대중문화개방이 관심의 초점이다. 400여일 남은 2000년사업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문화예술계는 지금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공연예술은 빈사지경이다. 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등은 최근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처럼 공연장 입장료에 부과되는 부가가치세를 면제해달라고 건의했다. 23일에는 연극협회가 궐기대회를 열어 연극계 구조조정방침의 철회를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든 공연을 중단키로 했다. 국립극장에 소속된 대부분의 단체를 비상근체제로 바꾼다는 소문 때문이지만 그것이 확정된 정부방침인지 아닌지 모호한채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 더 문제다. 문화인들은 문화활동을 경제논리로만 다루려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28일 관계장관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경제기자회견을 한다. 국민에게 위기극복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취지라고 한다. 경제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위기극복의 동기부여라면 문화예술계도 절박하다. 문화기자회견도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10월은 문화의 달이며 10월20일은 문화의 날이다. 10월중 적당한 날을 골라 관계장관을 배석시킨 가운데 문화회견을 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TV를 통해 한 차례 실시한 「국민과의 대화」를 문화만을 주제로 해보자. 문화대화는 방송사로서도 좋은 교양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문화인들은 우선 말이라도 속시원하게 나누고 싶어 하고 있다. 그 갈급(渴急)하고 절박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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