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朴斗鎭) 시인의 타계로 청록파(靑鹿派)의 시인들이 모두 퇴장했다. 청록파는 이제 시사(詩史)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고해서 그 시정신이 퇴락한 것은 아니다. 순수시의 본보기가 된 그 서정적 정서는 아직도 국민적 애송시가 되어 있는 박목월(朴木月)의 「나그네」, 조지훈(趙芝薰)의 「승무」, 박두진의 「해」 등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온다.3인시집 「청록집」이 발간된 것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이었다. 해방되고 나서 1945년 그해에 나온 시집은 시인 24명의 축시를 모은 「해방기념시집」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청록집」은 사실상 해방 후 첫 시집이나 다름없다. 광복 반세기의 우리시사는 「청록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이래 우리 시는 얼마만큼 발전해 왔는가.
우리 시단의 문학적 업적을 지금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다만 시가 성장해온 키를 시집의 수로 계량해보자.
1921년 김억(金億)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가 나온 이래 일정 36년동안 간행된 우리말 시집은 통틀어 150가지 정도다. 광복이 된 후 「청록집」이 나온 1946년에는 30여가지가 출판되었고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는 40여가지였다. 이것이 1973년에 100가지를 넘어서고 1984년에는 200가지를 돌파하더니 1989년에 800가지 이상이 쏟아져 나와 기록적이었다. 그 후로 증가세가 주춤했다고는 하지만 최근들어 1996년에 661가지, 작년인 1997년에 585가지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이런 시집의 양산은 전세계를 통틀어 유례가 드문 일이요 참으로 경이스러운 일이다.
가지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시집들 중에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100만부 이상씩이나 팔린 것들도 있다.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희한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시집뿐이 아니다. 시낭송의 열기 또한 우리나라만한 데가 없다. 전국 각지에 시낭송 모임들이 있어서 정기적인 낭송회를 개최하고 있고 서울의 공간시낭독회 같은 것은 200회를 돌파했다. 1980년대에 이미 전국에서 한해 100회를 넘는 시낭독회를 가졌다. 시낭송 콩쿠르까지 열린다.
기념에 인색한 우리나라이면서도 전국에 문학비(文學碑)가 330개 가량이나 되고 그 대부분이 시비(詩碑)다.
「청록집」 이후 우리 시는 부피가 이렇게 커지고 바닥이 이렇게 넓어졌다.
광복후 반세기동안의 우리나라의 성장은 여러면에서 평가되고 있고 문화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시다. 가히 시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시의 확산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최선진국이다.
양적 팽창이 반드시 질적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사회에 시가 흥건하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시의 불길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사회가 아무리 병들었더라도 원천은 썩지 않는다. 나라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촛불들은 살아있다. 문화의 세기가 다가온다고 한다. 시는 모든 예술의 원형질(原形質)이다. 문화의 불씨가 시다.
청록파의 마지막 퇴장이 우리나라 시세(詩勢)의 위용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의 열기를 문화의 에너지로 활용하기에는 아직 후진적이라는 실망을 갖게 한다. 박두진시인 같은 꼿꼿한 대시인의 죽음에 정부의 공식적인 조의(弔意) 한 마디 없고 TV의 특집프로 하나 없는 나라에서는 시의 불길이 아무리 일어도 큰 바람을 타기가 어렵다.
박두진 시인이 묻힌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은 시인의 고향 땅이다. 나는 연전에 시인과 동행하여 그가 자라던 동실리 평촌부락을 찾아간적이 있다. 안성의 곡창이라는 사갑들 가운데의 조그만 마을이었고 동쪽으로 넓은 벌 건너로는 차령산맥의 연봉들이 병풍을 치고 있었다. 시인은 이 자연풍경이 자신의 시적 영감과 시적생명력의 원천이라 했다. 소년시절 그는 여기서 산맥 너머로 떠오르는 장엄한 태양을 바라보았다. 시인이 된 후 그 황홀한 기억을 언젠가는 시로 형상화하리라고 마음먹고 있던 참에 광복이 되었다. 광복의 감격을 그 태양에 의탁해 시를 썼다. 그 시가 「해」다.
「청록집」에 실린 「해」는 이런 광복의 시다. 그리고 광복이후 찬란한 우리 시사의 모두(冒頭)가 되는 시다. 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았을 때 어떤 기념물도 세운 것이 없다. 광복 반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성과인 시의 승리를 축하하여 안성의 사갑들에 「해」의 기념물을 세운다면 그것은 동시에 광복 반세기의 상징물이 되지 않겠는가.<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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