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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의 서막(문민정부 5년: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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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의 서막(문민정부 5년:54)

입력
1998.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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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1전도 안받겠다” 혁명적 발언/“우리나라 너무 썩었어” 취임 두달후 성역없는 司正지시/재산공개도 전격적 단행… 정치권·공직사회 “난리”/사정중추 검찰 부자간부 많아 되레 재산파동 시련도문민정부 출범 이틀째인 93년 2월27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청와대의 외부 첫 손님으로 법조인 출신 K씨를 식사에 초대했다. 전날 발표한 문민정부 첫 조각에 대한 반응도 궁금했던 차에 오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K씨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덕담이 오가다 K씨는 대뜸 『대통령은 돈을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합니다』하고 화제를 바꿨다.

『그게 무슨 소리야』

김대통령은 다소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직접 정치자금을 걷어 나눠주지 않았어요. 장관이나 의원들에게 떡값이나 주고 하는게 부패의 온상이에요. 문민정부 대통령이 이런 구태를 답습하면 국민을 기만하는 겁니다』

K씨가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자 김대통령은 몇분간 말문을 닫은채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김대통령의 굳은 입이 열렸다.

『알았어, 며칠만 두고보게』

3월4일 취임후 처음으로 열린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취임사에서 「부패척결」과 「성역없는 사정」을 슬로건으로 내건 YS가 기자들에게 줄 첫 선물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선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경제인으로부터도 단 1전의 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5년간 누구도 나에게 돈을 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추석이라고 해서 떡값이 아니라 차값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김대통령의 선언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혁명적 발언이었다. 물론 취임전 인수위원회에서도 정치자금을 걷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거론은 됐지만 워낙 민감한 문제라 정식 건의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김대통령은 전날 주돈식(朱燉植) 정무수석을 불러 문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박관용(朴寬用) 비서실장에도 알릴 필요가 없다는 보안지시가 덧붙여졌다. 특유의 「깜짝쇼」였다.

김대통령의 측근인 또다른 K씨의 기억.『정치자금 거부선언은 누가 뭐래도 YS의 오랜 생각이 집약된 겁니다. 시중에 누구누구가 영향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언 정도였겠죠. 대통령의 선언후 정치권에서 난리가 났어요. 중진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설명했는데도 모두들 다음날까지 볼이 잔뜩 부어있었죠. 그러나 감히 YS에게는 뭐라 못하고… 아무튼 대통령의 뜻은 확실히 전달됐죠』

이에앞서 김대통령은 2월27일 본인은 물론 부친 김홍조(金洪祚)옹과 부인 손명순(孫命順) 여사 등 일가족 재산을 10원단위까지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평가액 4억 5,744만4,000원인 상도동 자택을 포함,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의 63빌딩 헬스 회원권까지 김대통령 일가 재산은 17억7,822만6,070원. (전병민(田炳旼)씨의 동숭동팀에서 마련한 개혁안에 따라 김대통령은 첫 국무회의에서 『개혁은 시대의 요청』이라며 재산공개 결심을 비장한 각오로 밝혔다.)

재산공개, 정치자금 근절등 김대통령의 개혁구상이 착착 진행되면서 언론에는 이미 사정대상자의 명단이 나돌았고 정치권과 공직사회는 거대하게 밀려드는 사정의 한기(寒氣)를 느껴야 했다.

3월 중순 김영수(金榮秀) 민정수석은 17일로 예정된 국가기강확립회의 보고차 김대통령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김수석, 우리나라가 너무 썩었어요. 모든 기관을 총동원해서라도 부패를 도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대통령이 내린 최초의 사정지시였다.

김수석의 회고.『YS는 신한국병의 실체는 부정부패라고 생각했어요. 부패가 나라를 망쳐놓았으니 고위공직자와 사회지도층이 먼저 맑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과거 성역권서 보호받았던 사람들, 특히 검찰까지도 부패한 사람이 있으면 쳐내라고 했어요. 어떤 기관 소속 간부들도 성역이 될 수 없다고 했죠. 내가 느끼기엔 성역일수록 더 쳐야 국민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라는 게 YS의 「사정관(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정의 중추였던 청와대와 검찰의 주요 포스트에는 성향면에서 과거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청와대 김수석은 검사출신이었지만 6공시절 안기부 제2특보­안기부장 비서실장­1차장­민자당 의원 등을 거치며 권부의 핵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같은 전력때문에 청와대 일부 소장파 인사들 사이에서는 김수석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이는 등 출발부터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시 청와대 한 비서관의 증언.『김수석은 사정수석에 적합치 않은 인물이었어요. 얽힌 인연이 너무 많았죠. 비서관회의를 할 때도 김수석에게 수시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확인해 보면 서동권(徐東權) 전 안기부장이었어요.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김수석 퇴진운동을 시작했지요』

상황은 검찰도 비슷했다. 김대통령은 취임후 검찰총장과 대검 중수부장에 검찰내 TK인맥의 대부인 박종철(朴鍾喆) 대검 차장과 정성진(鄭城鎭·현 국민대 교수) 대구지검장을 기용했다. 본인들도 예상못한 뜻밖의 인사였다. 청와대 사정1비서관을 지낸 이충범(李忠範) 변호사의 회고.『당시 검찰인사는 서열을 무시하고 사람을 함부로 뺄 수 없다는 보수인사들의 이야기에 대통령이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죠. 개혁 세력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들어서 아는 것이 병이었어요.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를 기다린 겁니다』

그러나 검찰 고위간부출신 인사의 해석은 다르다.『당시 인사는「TK로 TK를 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적인 면도 없지 않았어요. 실제로 슬롯머신 사건이후 박총장이 석연찮게 중도하차한 것도 그런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청와대와 검찰간에도 난기류가 흘렀다. 한 검찰간부의 설명. 『당시엔 구조적으로 청와대와 검찰간에 채널이 있을 수가 없었어요. 청와대에선 검찰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에 대한 감이 없었고 우리쪽(검찰)에서도 서먹했지요. 더구나 총장은 TK출신이고, 김수석도 검찰출신이지만 완전히 검찰 입장에 서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정의 방향타를 잃고 헤매던 검찰은 이즈음에 터진 재산공개파동에 직격탄을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사상 처음으로 차관급 재산공개가 이뤄진 93년 3월26일 밤. 서소문 대검청사는 불을 훤히 밝힌 채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전체 차관급 공무원 125명중 30%가 넘는 검사장급 이상(법무차관 포함 40명) 검찰 고위간부들의 재산공개가 몰고 올 파문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차관급중 모두 62억5,000여만원을 신고한 정성진 중수부장을 포함, 재산보유액 순위 10위권 내에 검찰간부가 5명, 20위권 내에는 9명이나 포함됐다.

한 검찰간부의 기억. 『우리로선 너무 다급했어요. 급한 김에 언론사 사회부장들을 초청해 「왜 사회부처 장·차관들만 재산공개 파동에 휩쓸려야 하느냐. 타깃은 배부른 경제부처가 되야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기도 했지요』

결국 비난 여론에 밀린 김두희(金斗喜) 장관과 박종철 총장은 랭킹1위 정중수부장과 최신석(崔信錫) 대검강력부장의 사표를 받는 선에서 파문을 수습했다.

PK출신인 김도언(金道彦) 대검 차장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대지 350평(공시지가 29억5,000만원)을 포함, 39억원의 재산을 보유하는 등 검찰랭킹 2위였지만 재산공개의 파고를 뒤탈없이 건너갔다.

재산공개의 여파는 컸다. 검찰을 향한 불만이 청와대는 물론 사회 각계층에서 흘러 나왔다. 『역시 검찰은 안돼』,『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격이지...』

『재산공개 파동은 문민정부 출범이후 검찰에 닥친 최대의 시련이었다』는 한 검찰고위간부의 말처럼 여론의 도마위에 오른 검찰은 좌초위기로 몰리고 있었다.<이태희 기자>

◎재산공개 막전막후/개혁·문민사정 기초 제공 법적준비·기준없어 부작용도/재산많은 검찰 중수부장 등 YS 완강입장에 결국 사표

공직자 재산공개는 김대통령의 개혁구상중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린 몇 안되는 성공작이었다. 문민 사정의 단초를 제공했고 공직자들이 국민의 눈을 두려워하게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법적 준비없이 김영삼 대통령의 「선창(先唱)」에 따라 「혁명」처럼 불어닥친 만큼 부작용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재산공개가 이뤄진 93년 3월26일. 랭킹 1위로 드러난 정성진 중수부장은 요로에 재산형성과정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재산중 대부분은 87년 사망한 장모 김복희(서민호·徐珉濠 전 의원의 부인)씨가 유산으로 물려준 것이었다.

검찰 간부들이 줄줄이 재산공개파동의 도마위에 오르면서 검찰 수뇌부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떻게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손을 놓고 있었다. 일요일인 28일 저녁 박종철 총장은 사무실에 있던 정중수부장을 긴급 호출했다.

박총장=『정부장, 어쩌면 좋지... 조직 전체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세요』

정부장=『총장님, 기준이 없지 않습니까. 내부 검증도 거치지 않았고요. 옥석을 가리지 않고 유전유죄(有錢有罪)식이라면 승복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정중수부장은 김두희 법무 장관에게서 『걱정말라』는 언질을 받아둔 상태였다. 정씨의 회고.『재산공개를 며칠 앞두고 김장관을 참모자격으로 찾아가 면담을 했어요. 스스로 생각해봐도 액수가 너무 많고 다른 사람도 그런 것 같은데 파문을 최소화하려면 신속히 재산형성과정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건의했죠. 사정실무자로 활동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보직을 변경해달라고 했어요. 김장관은 「당신을 믿고 중수부장을 시켰는데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더군요』

정중수부장을 상관으로 모신 경험이 있는 김영수 민정수석도 김대통령에게 정씨의 사정을 전했다. 김대통령은 김수석의 말을 처음에 납득하는 듯 했지만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완강한 입장으로 돌아섰고 이러한 뜻이 일요일 오후 검찰에 전달됐다.

정씨의 이어지는 회고.『YS가 경남고 동창모임에 갔다 오더니 태도가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이미 청와대의 뜻은 전해졌고 장관은 다음날로 예정된 대통령 면담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결국 랭킹 1위인 저와 마음착한 최신석 강력부장이 타깃이 된 거죠』

정중수부장은 이날 새벽 2시 눈물을 삼키며 사표를 보냈다. 문민사정을 지휘해야 할 검찰의 사정중추가 사정의 밑그림 조차 그리기 전에 낙마하고 만 것.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말.『개인적인 사연은 전달됐지요. 그러나 노도에 밀려갈 때는 금칠을 한 조각배라도 구해낼 방법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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