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惡化 책임 뒤집어쓴 ‘재협상論’/국민회의 추가협상주장 발단 1주일 못돼 상황 돌변/캉드쉬 총재까지 끌어들여 대선막판 진흙탕 싸움/YS·3당후보 청와대서 “협약이행” 재천명 일단락「국수주의 논조 및 대미·국제통화기금(IMF) 자극 논조를 자제시킨다. 국내의 반(反)IMF, 반미감정을 억제한다.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IMF 협약준수를 재천명한다」
대선을 이틀 앞둔 97년 12월16일 오전 10시30분. 고건(高建) 총리 임창렬(林昌烈) 경제부총리 권영해(權寧海) 안기부장 유종하(柳宗夏) 외무장관 이경식(李經植) 한은총재가 청와대에 모였다. 환란(換亂)을 수습하기 위한 제3차 경제대책회의. 이날 나온 대책중 경제홍보 강화부문은 이렇듯 국적이 불분명했다. 환란을 타고 「반미(反美)」가 재등장한 것은 「어설픈」IMF 협상 결과로 촉발된 「재협상론」때문이었다. IMF 재협상문제는 대선 막바지의 최대 이슈였고, 재협상론자는 국수주의자로까지 몰렸다. 왜 그랬을까.
재협상론을 제기한 것은 경실련 등 사회단체와 일부 경제전문가, 정당으로는 국민회의였다. 국민신당과 한나라당 역시 한때 재협상쪽이었다. 예고없이 IMF사태를 맞은데다 협상과정과 결과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IMF 협상의 기본틀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태국 멕시코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협상 타결 다음날인 12월4일. 국민회의 김원길(金元吉) 정책위의장은 논평을 통해 추가협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대중(金大中) 총재도 이를 언급했고, 여론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1주일도 못돼 상황은 급변했다. IMF 지원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이 더욱 악화하자 재협상론이 책임을 뒤집어 쓴 것.
『김대중후보는 국민감정에 편승해 IMF와의 재협상론을 끊임없이 주장, 대외신인도를 크게 떨어뜨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11일 한나라당 부대변인 논평) 재정경제원 등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 언론은 외신 등을 인용, 재협상 주장이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으며 언론보도 역시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거들었다. 차동세(車東世) 한국개발연구원장은 한 강연(11일)에서 『사자가 사슴을 먹겠다고 달려들면 사슴 한마리가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재협상한다고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사슴론」을 펴기도 했다. 양수길(楊秀吉)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등도 마찬가지였다.
재협상을 놓고 대선후보들이 TV토론회에서, 유세장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급기야 캉드쉬 IMF총재까지 동원됐다. 차원장의 강연이 있던 날. 조순(趙淳) 한나라당 총재는 새벽에 캉드쉬 총재에게 전화를 건 후 기자회견을 자청,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재협상발언 등은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이런 불신으로 말미암아 자금지원이 안되는 사태를 빚을 수 있다. (중략) 재협상 요구 등 믿지 못할 상황이 초래될까 봐 대선 후보들의 각서를 요구했다」 그가 전한 캉드쉬총재의 말은 재협상론자를 문책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재협상 문제를 누가 먼저 꺼냈느냐』는 질문끝에 조총재가 『캉드쉬총재가 직접 그런 언급은 하지 않았다』고 물러서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같은 날 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캉드쉬총재에게 협약지지 서한을 팩스로 보냈다. 캉드쉬총재도 「협의안에 대해 분명하게 지지를 밝힌 것은 만약의 상황에 있을 수 있는 불안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고 발표했다.
국민회의는 왜 재협상론을 제기했을까. 김원길 의장의 설명. 『우리의 주장은 추가협상(REVIEW)이었지 재협상(RENEGOTIATION)은 아니었다. 김총재는 IMF가 3당 후보의 각서를 요구했을 때 이를 분명히 했다. 물론 그달 11일자 신문초판에 「재협상」 문구가 들어간 광고가 실린 적이 있다. 그러나 홍보팀이 사전협의없이 내보낸 것이었고, 김총재가 즉각 중지하라고 지시해 밤사이 「재협상」 문구를 뺐다』
그는 『사실 정부가 IMF 지원을 공식요청하기 한달반 전쯤 김대중총재가 「IMF행을 고려하는 게 어떠냐」고 말한 적이 있고, 그때부터 IMF 지원절차 및 후속 상황을 검토해 왔다』고 덧붙였다.
잠시 IMF와의 협상이 타결된 3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캉드쉬 총재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30분. 서명식과 대통령 면담 등 모든 일정이 오전중으로 끝나게 돼 있었다. 하지만 서명식은 오후 7시40분. 캉드쉬 총재가 느닷없이 3당 후보의 각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경원 고위간부의 회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 예가 없지 않느냐고 따졌죠. 그러나 (캉드쉬 총재는) 있다는 겁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행약속을 하겠다고까지 했지만. 세 후보가 대통령에게 각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절충됐습니다』 그 사이 임부총리와 재경원 주요 간부들은 『캉드쉬가 그냥 떠난다고 한다. 협상이 좌절될지 모른다』고 세후보에게 통사정해 각서를 받아냈다. 다음은 각서내용.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IMF와 협의된 내용을 원칙적으로 이행할 것입니다. 다만 협의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행함에 있어 계속적인 논의와 세부사항에 대한 협상을 통해 급격한 경기후퇴에 따른 대량부도, 대량실업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입니다』(김대중 후보)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동 협의내용을 협의된대로 이행할 것입니다』(이회창·이인제 후보/ 두 후보는 공항 등에서 재경원이 미리 작성한 각서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재협상론은 과연 금융상황을 악화시킨 주범일까.
3당 후보가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IMF협약이행을 재천명한 13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2층 백악실. 1시간10분간의 비공개 회의에서 재협상문제가 주된 메뉴였다. 임부총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난번 각서를 냈는데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 대단히 유감스럽다. 왜 산업은행이 해외에서 기채에 실패하고 미국 주요 은행이 한국의 국가부도 운운하게 되었는가. 후보중 어느 분의 언동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면 재협상하겠다고 말한 분이 책임지고 사과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이회창)
『원칙적으로 내 입장은 IMF 합의사항을 지지하지만 구체적 문제, 보완적 문제에 대해 다시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언어의 혼선이 있었다. 추가적 협상을 의미하는 것이지 IMF와의 합의를 전면 부인하고 뒤집고 다시 한다는 것은 아니다』(김대중)
『IMF 협상타결 당시보다 지금 무엇이 어떻게 나빠졌는가. 정부가 외환에 문제가 없다고 해 놓고 나빠진 외환사정의 원인이 정치권에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유감이다. 임부총리, 후보들이 말을 잘못해서 신인도가 나빠졌다는 것인가』(이인제)
『특별히 (상황이) 불리해진 것은 없습니다』(임창렬) 협상 주역 임부총리의 발언은 반재협상론자에겐 의외였다. IMF 초기 권고는 지난달 3·4분기 협의에서 대폭 수정됐다. 「재협상론자」의 판단이 옳았던 셈이다. 또 임부총리의 설명처럼 재협상자체가 주범이 아니었다. IMF 합의사항의 파장을 예상하지 못한채 이행하느냐 마느냐만을 놓고 벌인 말꼬리잡기 경쟁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또 재협상론을 지나치게 이슈화한 정치권, 이런 소모전을 조기에 매듭짓지 못한 정부와 언론이 잘못이었다.<정희경 기자>정희경>
◎IMF 고금리·재정긴축 처방/부도·부실여신 급증 부작용에/재협상론 틀 뛰어넘어/7개월만에 전면수정 선회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지원에 나선 지 7개월여만에 고금리·고환율·재정긴축을 골자로 한 초기 처방을 전면 수정했다. 지난해 재협상론자는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이번 수정은 이를 뛰어 넘었다. 첫 협의에서 부가가치세 인상을 주문했던 IMF는 7월 3·4분기 협의에선 교통세 인상에 제동을 걸기까지 했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에서 마이너스 4%로, 재정수지는 균형에서 17조5,000억원의 적자로 각각 수정했다. 실물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는 등 처방의 부작용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 5%로 재조정하고 재정적자폭도 늘렸다. 정부 당국자는 『IMF는 실물경제가 현 상태대로 방치될 경우 그동안 제공해 온 구제금융을 회수하기도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최근 한국경제보고서를 통해 『외환보유고 확충을 위한 고금리 및 긴축통화정책은 기업부도를 늘리고 은행의 부실여신을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여신을 크게 축소시켰다』고 지적했다.
제프리 삭스 교수(미국 하버드대) 등은 초기부터 『개발도상국에 대한 IMF의 처방은 대부분 위기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고금리 재정긴축 은행폐쇄 등 전형적인 위기처방을 적용함으로써 심각한 경기위축을 불필요하게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들 비판은 상황이 악화한 후에야 빛을 발했다. 1차적인 책임은 외환위기에 미리 대처하지 못한 정부에 있다. 그러나 「IMF 합의이행=경제위기 탈출」이라는 도식에 빠져들게 한 「IMF 재협상 공방」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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