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模範 잃은 사회(金聖佑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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模範 잃은 사회(金聖佑 에세이)

입력
1998.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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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사정 바람이 불고 있다.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어차피 불어야 할 바람이다. 구식의 정치구조를 쓸어내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건립하자면 바람의 정지(整地)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 부는 바람 자체는 새로운 바람이 아니다. 어제 불던 바람이다. 조금도 놀라울 것 없다. 이 놀라울 것이 없다는 데 놀라움이 있다. 어제 불던 바람이 못다 쓸고 간 잔재가 아직 이렇게나 남아 있었던가.지금 들추어지고 있는 비리들은 모두 김영삼 정권 때의 것이다. 그토록 개혁의 깃발을 앞세우고 정권 내내동안 사정의 칼날을 번뜩여온 그 시퍼런 서슬의 그늘에서도 여전히 비리가 야행(夜行)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또 오늘 이 사정바람의 저변에는 어떤 반풍(反風)의 비리들이 잠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면 사정은 언제까지나 되풀이되고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사정에는 정면(正面)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면(反面)도 있다.

우선 김영삼정부 때 각종 비리 혐의로 구속된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의 직위를 보자.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5명의 국방장관을 포함한 전직장관이 9명, 전·현직국회의원이 10여명, 전 안기부장, 전 감사원장, 전 청와대 경호실장·청와대수석, 전 해군참모총장·공군참모총장·해병대사령관, 전 경찰청장·국세청장·병무청장 등등. 우리나라의 요직이란 요직은 다 망라되어 있다. 화려한 직명록(職名錄)이다. 차관급 이상 공직자가 50여명이나 구속되었다.

김대중정부 들어서도 벌써 구속된 고위층은 전 부총리를 비롯하여 전 장관, 전 안기부장, 현국회의원, 전 국세청장 등으로 요직의 리스트를 다시 착실히 나열해 가고 있다.

이런 직책들이 한두 사람만 끼여도 경악할 일인데 국민들은 이제 어떤 직명이 줄줄이 묶여도 무감각해졌다.

우리 사회는 지금 권위의 실권이 문제가 되어 있다. 권위주의를 쓸어내면서 권위도 함께 쓸려 나갔다. 독재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모든 분야의 위엄이 끌어내려졌다.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이다. 그 이후로 줄을 이은 고관들의 수감쯤은 시답지도 않게 된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것이 있다. 한편으로는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남을 괴롭힘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이 성격 속에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동시에 들어있다. 집권자의 권위주의는 국민을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만든다. 오랜 독재체제 아래에서 우리 국민들은 이 성격에 물들었고 권위주의가 물러가면서 권위에 복종하는 마조히즘 대신 이번에는 권위에 가학하는 사디즘적인 요소가 강해졌다. 권위의 말살은 민중의 가학성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상(彫像)을 세우는 대중은 그 조상이 쓰러질 때 더 쾌감을 느끼고 더 큰 박수를 보낸다. 이것이 대중의 악취미다. 이 악취미에 영합하여 고관대작의 이름들이 우수수 낙엽지고 있는 우리 사회는 그 고소함으로 만족하고 있을 때인가.

고위직들이 무더기로 쇠고랑을 차는 광경을 보면서부터 우리 사회에는 「높은 사람」을 우습게 보고 얕잡아보는 풍조가 생겼다. 아래 위도 없이 아무나 서로 맞먹으려고 한다. 존경심이 없다. 사람의 가치도 직위의 가치도 무너져 버린 상태다.

물론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는 시대다. 그러나 민주주의라 하여, 평민주의라 하여, 평위(平位)주의의 시대인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높은 자리는 있게 마련이다. 평등주의가 균등화주의가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인격적으로는 동격이더라도 직위적으로 동위(同位)일 수는 없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는 체계와 체통을 잃는다.

「높은 자리」 「잘 된 사람」에 대한 신뢰나 존경심의 상실은 곧 모범의 상실이다. 이 모범의 상실은 공직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파급된다. 온 사회를 본받을 사람이 없는 사회로 만든다. 전범(典範)이 없는 사회는 성취동기를 죽인다. 이래 가지고는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부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겠는가.

비리를 없애기 위한 사정이 우리 사회의 모범을 없애는 일면이 있다고 해서 사정을 안할 수는 없다. 최후의 1인까지 발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또 언제까지나 사정만 반복하고 있을 수도 없다.따라서 한편으로는 비리를 예방하여 모범을 재건하는데 사정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라을 살리자면 모범을 살려야 한다.<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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