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발복 바라는것 잘못/각계 고위인사 앞장서서/장례문화 이젠 바꾸어야풍수를 공부하면서 아직도 일반인들의 오해를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 있다. 바로 풍수는 화장을 금기시한다고 알려진 점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정통의 풍수서에서 화장을 하지 말라는 대목은 없다. 고려 왕조의 지배이념이 선종과 풍수설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고려의 왕중에는 화장을 한 사람들이 있다. 제7대 목종과 8대 현종의 원목왕후 서씨는 정사에 화장했음이 기록으로 남아있고,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화장을 주장하였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작년말 방북 때 개성 근교 태조 왕건릉에서는 북의 관련학자로부터 왕건도 처음에는 매장하였지만 그 후 화장하여 전란시에는 유골함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고, 몽고 침입 당시의 왕들도 자기 선대 임금들의 유해를 화장하여 수시로 피난을 다녔다는 말도 들었다.
본래 장법(葬法)의 근본은 고인을 편케 모심에 있는 것이지 그로부터 더 이상 무엇인가를 얻고자 함이 아니다.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어디에 덮어두고 이미 백골이 된 그분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더 얻어내고자 한다면 땅의 이치(地理)는 커녕 하늘의 뜻이 편을 들 수 있겠는가.
명색이 풍수를 전공하는지라 무수한 얘기를 듣게 되는데 명당 하나를 얻어씀으로써 고관대작이 됨은 물론 대통령을 낼 수도 있다는 괴이한 말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는다. 고려와 조선의 수많은 임금들은 모두가 당대 최고의 지관들을 총동원하여 그 묘터를 잡았다. 그런데 그들의 집안 꼴은 어찌 되었는가. 아들이 그 어머니를 범하고 형제를 서로 죽였으며 숙질사이의 싸움은 항다반사가 아니었던가. 무릇 풍수설에서 땅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출과 배우와 극본이지 무대는 아니지 않는가. 일의 성사 여부에 대한 책임은 결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80년대부터 새로이 일기 시작한 명당잡기 놀음은 우리나라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부인하지 못할 현상이었다. 그 발복의 결과가 오늘의 외환위기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이란 것을 쓰고 망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자신을 잃은 사람이 땅에 핑계를 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SK그룹 고 최종현(崔鍾賢) 전 회장의 화장 소식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큰 사건이다. 고인 생전에 몇번 그의 고견을 들을 수 있었던 필자는 그분에게 누누이 우리 장묘문화의 문제점과 화장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었고 그 점에서 완전한 동감을 이뤘다. 작년 11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분은 그룹차원에서 화장장과 납골당을 짓는 문제에 대하여 동석한 당시 손길승(孫吉丞·현 그룹회장) 부회장에게 직접 지시하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화장장이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어린이들까지도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화장률이 크게 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분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 주변은 공원화하여 유족들이 쉽게 찾을 수 있고 아이들도 가보고 싶어 하는, 그런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도 있었다. 이제 그 문제는 그 분의 유족과 회사 후배들의 몫으로 남겨진 셈이거니와, 필자는 그에 덧붙여 화장예고제를 제시한다.
생전에 장기 이식을 약속하는 것처럼 화장을 유언으로 공표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앞장서야 할 사람들은 소위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 가톨릭에서는 화장을 꺼리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 신자로 알려진 현 대통령부터 화장예고를 해두는 것이 그 파급효과면에서 가장 강력할 것이라는 점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그리고 장차관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군장성 재계인사 교육계 및 문화계 인사들이 그 뒤를 잇는다면 화장 문화는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전 서울대 교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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