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 “韓銀 독자감독권 안된다” 고집/‘KK라인’ 등장하자 금융개혁 주도권 재경원으로/IMF 눈앞서도 “金改法 통과되면 위기해소” 억지/4인 밀실 회동때 이경식 한은총재는 들러리 신세97년 6월12일 저녁. 한국은행 창립 47주년 리셉션장. 식장에 참석중이던 강경식(姜慶植) 경제부총리와 이경식(李經植) 한은총재가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잠시후 청와대 서별관. 강부총리 이총재 김인호(金仁浩) 경제수석 박성용(朴晟容) 금융개혁위원장 등 이른바 「금융개혁 4인방」이 모였다. 어두운 표정들이었다. 중앙은행제도와 금융감독체계를 뜯어고친다는 총론적 합의에도 불구, 각론에선 좀처럼 합의가 도출되지 않고 있었다. 최대 쟁점은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후 한은에 독자적 감독권을 부여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하려면 최소한의 독자적 감독기능은 확보되어야 합니다』(이총재) 『통합감독기구가 생기는데 한은이 독자감독권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강부총리 김수석) 의견은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틀후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합의안을 보고해야 했다. 촉박한 시간은 긴 토론을 허락치 않았다. 이총재는 몰릴 수 밖에 없었다.
6월16일 오전 10시 재경부 대회의실. 강부총리는 이총재, 박위원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12일 4자회동에서 합의된 한은법 개정 및 통합감독기구 설립에 관한 정부안을 발표했다. 골자는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분리, 통합감독기구를 설립하고 한은은 금융기관 공동검사권만을 가지며 한은을 의사결졍기구(금융통화위원회)와 집행부로 이원화한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한은의 반발은 대단했다. 재경원(구 재무부)과의 반세기 대립역사를 통해 한은맨들의 뇌리속엔 「은감원 분리=한은 무력화=재경원 관치 강화」란 항등식이 뿌리박혀 있었다. 직급별 비상대책회의가 잇따라 소집됐고 「4자간 밀실합의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성명이 잇따랐다.
한은 관계자 A씨의 설명. 『이총재는 중앙은행이 은행장부를 뒤지고 벌주는 일까지 할 이유는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정부의 은감원 분리요구에 선뜻 동의했던 것이지요. 일리있는 생각이었지만 재경부가 그토록 은감원과 한은을 분리시키려는 숨은 뜻, 즉 강력한 중앙은행을 용납치 않겠다는 발상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문제를 너무 쉽게 또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한은내에선 「반(反) 재경원, 반 이총재」움직임이 번져갔다. 노조를 중심으로 한 직원들은 연좌농성에 들어갔고, 이총재 퇴진 서명운동이 뒤따랐다. 경실련 민노총 경제학교수들이 정부안을 일제히 「중앙은행 말살·관치금융 강화기도」로 규정, 반대운동에 합류하면서 한은법 파동은 학계와 노동계, 시민단체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87년과 95년에 이은, 어떤 면에선 훨씬 강도높은 「제3차 한은법 파동」이었다.
돌이켜보면 파동은 피해갈 수도 있었다. 한은법 개정과 감독기구통합 얘기를 꺼낸 쪽은 금개위였지만, 어디까지나 문제제기 수준이었지 「사건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었다. 금개위의 활동상황을 짚어보자.
97년 벽두 장안의 화두는 「금융개혁」이었다. 1월8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전면적 금융개혁」을 선언한 김대통령은 순수민간인사들로 짜여진 금융개혁위원회를 22일 대통령 직속기구로 발족시켰다. 위원장에는 박성용금호그룹 명예회장, 부위원장에는 김병주(金秉柱) 서강대 교수가 임명됐고 교수 금융기관장 기업체사장 회계사 등을 망라한 31명의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원래 한은법은 금개위의 현안이 아니었다. 당시 금개위에 참여했던 L씨의 회고. 『금개위는 재무관료에 대한 불신이 컸던 이석채(李錫采) 경제수석의 작품이었고, 금융개혁에 대한 그의 애착은 꽤 컸습니다. 그런데 자신만만한 이수석도 한은법 만큼은 유보적이었어요. 95년 재경원 차관 당시 한은법 파동을 경험했던지라 이 문제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이고 잘못 건드리면 금융개혁 전체가 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중장기 검토과제였던 한은법 문제가 왜 갑자기 정권임기중 꼭 처리해야 할 당면과제가 된 것일까. L씨의 계속된 설명. 『금개위를 이수석이 계속 끌고갔다면 한은법 파동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한보사태로 이수석이 물러나고 강경식김인호 라인이 등장하면서 금융개혁의 주도권은 금개위에서 재경원으로 넘어갔습니다. 더구나 금개위의 단기과제 검토작업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4월께 끝나 더이상 할 일이 없게 되자 강부총리는 재임중 한은법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은법 개정을 진정 고집했던 사람은 강부총리 한사람 뿐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사자인 재경원도 한은도, 이 오랜 싸움만은 피하고 싶어했다. 여당(신한국당)은 여당대로 정부편에 서면서도 대선가도에 행여 장애가 될까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고, 국민회의는 아예 「한은법 문제는 차기정권으로 넘기자」는 게 당론이었다.
하지만 강부총리만은 달랐다. 정말로 한은법 개정 없이는 금융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반대가 심할수록 더 고집스러워지는 특유의 스타일 때문이었을까. 83년 재무부장관 시절 한은은감원 분리를 추진하려다 실패했던 「구원(舊怨)」을 풀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한가지 짚고가야 할 점은 주요 의사결정이 강부총리 이총재 김수석 박위원장등 4자 합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밀실합의」라는 비난에도 불구, 6월4일과 12일, 19일, 28일, 7월7일, 8월11일 등 최종확정안이 만들어지기까지 4자 혹은 5자(8월11일엔 박위원장 대신 총무처장관과 법제처장이 참석) 밀실회동이 계속됐다. 한은 관계자 Q씨의 설명. 『이같은 중대사안을 몇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안팎으로 샌드위치가 됐던 이총재는 어쩔 수 없이 발은 담궜지만 강부총리와 김수석이 주도하는 4자회동 구조상 「들러리」를 서는 모습이 되어가자 언짢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총재는 훗날 사석에서 『나름대로 목소리를 냈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97년 하반기 기아사태 이후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은법 공방은 멈추질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설이 임박한 11월14일 국회 재경위. 야당 반대로 한은법 개정안과 통합감독기구설치법을 포함한 13개 금융개혁법안의 합의처리가 어려워진 정부·여당은 마지막 카드(표결처리)를 던졌다. 그러나 출석의원 20명중 한은법 개정 반대파(국민회의 자민련)가 13명인 반면 찬성파(신한국당 민주당)는 7명 뿐. 표결로 갔다가는 부결되는 상황이었다.
강부총리는 여당의원들의 소재파악을 지시했다. 여당의원들의 표결참석을 위해 거의 모든 재경원 간부들이 전화통에 매달렸고 국회주변을 돌아다녔다. 비슷한 시각 한은직원들은 표결처리 저지를 위해 국회로 몰려갔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본점에 남은 직원들은 증권·보험감독원 직원들과 함께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IMF 「신탁통치」가 꼭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절박한 상황에서 보여준 재경원과 한은의 모습이었다.
국회통과는 일단 보류됐다. 그러나 재경원과 한은직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시장은 이미 손쓸 수 없이 무너져있었다. 19일 강부총리는 경질됐다. 그러나 그는 퇴임순간까지도 「금융개혁법이 통과되면 외환위기는 해소된다」, 즉 「한은법과 통합감독기구설치법이 처리되지 않아 위기가 왔다」는 자신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IMF사태는 터졌고 환란(換亂)의 책임자인 재경원이나 한은은 더이상 싸울 힘도, 면목도 없었다. 12월29일. 한은법 개정안과 통합감독기구설치법 등 금융개혁법안들은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희망대로 「연내 한은법 개정」은 관철됐지만, 승자는 없었고 남은 것은 거덜난 나라경제 뿐이었다.<이성철 기자>이성철>
◎97년 3차 한은법 파동 일지
6.3 금개위 금융개혁 최종안 대통령 보고
4 1차 4자(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총재 김인호 청와대수석 박성용 금개위원장)회동
12 2차 4자회동
14 4자 합의안 대통령 보고
16 강부총리, 금융개혁 정부안발표, 한은 부서장 반대성명 발표, 투쟁선언
19 3차 4자회동
27 전직 한은총재 회동, 정부안 반대성명
28 4차 4자회동
7.1 국민회의, 한은법 차기정권 처리방침 표명
7 5차 4자회동
10 강부총리, 정부수정안 발표
24 금융개혁법안 입법예고
8.7 금통위, 한은법 개정안 수정요구
11 5자(강부총리 이총재 김수석 신우영 총무처장관 송종의법제처장)회동
19 금융개혁법안 국무회의 의결
21 금융개혁법안 대통령 제가
23 금융개혁법안 국회 제출
9.1 김영삼 대통령,금융개혁법안 연내매듭 지시
13 한은, 독자한은법 개정안 입법청원
11.14 정부여당 금융개혁법안 표결시도 실패,
한은직원 국회앞 시위
19 강부총리 경질
12.29 금융개혁법안 임시국회 통과
◎한은법 파동의 역사/“중앙銀 견제” “독립지위 확보”/재무부한은 오랜 갈등/87년,95년에도 들썩들썩
재정경제부(구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관계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다. 어떻게든 중앙은행의 손발을 묶어두려는 재무부와 무슨 일이 있어도 독립적 권한과 지위를 확보하려는 한은의 공방은 때론 「밥그릇 싸움」으로 변질되기도 하면서 최근 10년동안에만도 두차례나 크게 불거졌었다.
제1차 한은법 파동의 불을 먼저 당긴 것은 한은쪽이었다. 87년 7월 민주화 물결속에 한은직원들의 「한은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1차 파동은 각 정당이 「한은 독립」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13대 여소야대 국회에서 각 당이 독자한은법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속도감있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중앙은행 독립」은 정치권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법개정 노력은 갈수록 퇴색해 갔다. 한은은 이에 88년 11월 김건(金建) 총재가 독자적 법개정 방향을 공식발표했고, 100만명 가두서명운동에 나서면서 「대치국면」을 연출했다. 89년 1월부터 재무부와 한은은 실무협의회를 구성, 협상을 벌였으나 끝내 합의도출엔 실패했다. 정치권도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를 꺼려했고 2년이 넘게 끌었던 한은법논쟁은 결론없이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2차 파동은 재정경제원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94년말부터 민주당 경실련 등을 중심으로 한은 독립논의가 확산되자 95년 2월 재경원은 은감원 분리 및 통합감독원 설치를 골자로 한 한은법 개정안을 전격 발표, 한은에 직격탄을 쐈다.
그러나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은과 시민단체, 대학교수들이 연대한 반대운동이 거세지면서 여권은 한은법 개정강행을 유보했다. 결국 법안은 심의조차 받지 못한채 14대 국회폐회에 함께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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