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권 등 사실상 ‘대권’ 승계/경제난국 돌파 여부따라 옐친 레임덕 가속 전망러시아 정국이 경제위기를 축으로 급류를 타고 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23일 전격 단행한 개각은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의 총리 복귀에 그치지 않고 크렘린 권력의 급격한 이동과 체르노미르딘의 전면 부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옐친은 체르노미르딘을 재기용한 전날 내각해산에 이어 24일 대국민연설을 통해 『이번 개각에는 2000년 권력승계를 보장하기 위한 포석이 감안됐다』고 밝힘으로써 처음으로 체르노미르딘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했다. 체르노미르딘은 아울러 옐친으로부터 조각권 등 사실상 「위기관리 대권」을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젊고 추진력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며 체르노미르딘을 해임할 때만 해도 옐친은 급진적 시장경제개혁에 정권의 승부수를 걸었다. 그러나 키리옌코 전 총리와 보리스 넴초프 부총리 등으로 이어지는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의 급진책은 러시아 특유의 과두자본(신흥 재벌) 및 이들과 결탁된 보수 정치세력 등 기득권층의 이해를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급진개혁안은 국가 두마(하원)에서 봉쇄되고, 시장의 불신은 더욱 확산되는 악순환이 17일 루블화 평가절하라는 「파국」을 초래하는 상황을 맞았다. 시장경제주의자이면서도 이론과 현실 사이에 균형을 갖춘 인물, 개혁주의자이면서도 정·재계에 드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체르노미르딘에 대한 옐친의 선택은 이런 점에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도파인 체르노미르딘의 부상에 따라 러시아 경제개혁은 구조개혁보다는 시장 부양 등 일단 현실주의로 U턴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체르노미르딘은 취임 일성으로 『현실적인 분석을 거쳐 금융 및 증시 안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접근이 성공할 경우 현재 의회 내 10%선에 머물고 있는 우리집 러시아당을 이끌고 있는 체르노미르딘의 정치적 입지는 「후계자」차원을 넘어서 2000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그의 입지가 넓어질수록 91년 이래 「차르(전제군주)」로 군림해 온 옐친의 레임 덕 현상은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국내용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의 역량이 해외투자의 유입 같은 외부환경에 얼마만큼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러시아 경제는 그의 총리 재임 시절보다 훨씬 악화해 있는 상태다. 게다가 차기 대선을 감안하고 있는 공산당 등에서는 벌써부터 그에 대한 임명 취소 공세를 시작하는 등 험난한 노정이 예고되는 상황이다. 조야에서 대선을 차분히 준비해 온 체르노미르딘의 갑작스런 「기회」는 거꾸로 「위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장인철 기자>장인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