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고있다. 한낮의 햇살은 이미 성하(盛夏)의 집요함을 잃었다. 맨몸을 가리지않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는 새벽녘의 서늘한 기운을 견디기 힘들다. 아이들의 방학이 끝나면서 떠들썩했던 집안도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이맘때 쯤이면 농부가 아니어도 한여름동안 흘린 땀방울을 세어보고 곧 있을 수확을 가늠해보며 소박한 기대감에 젖기도 한다.그러나 올 여름을 보내는 심정은 이렇게 여유롭지 않다. 내내 수마(水魔)에 시달려야 했던 끔찍한 기억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올 가을에 도무지 거두어들일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지난 연말 IMF사태가 덮쳤을 때 모두들 참혹한 절망감 속에서도 한가닥 위안받을 구실을 찾아냈다. 수십년간 굳어져온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왜곡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른 봄 새 정부가 총체적인 구조개혁을 지상목표로 선언하고 나서고, 국민이 금가락지를 뽑아 눈물겨운 신국채보상운동을 벌였을 때만해도 그런 기대는 막연한 위안거리 이상의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그 때의 의욕과 정서로 보아 이 때쯤이면 구체적 결실은 아니더라도 뭔가 희망적인 조짐은 나타나야 옳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정치판은 단 한치도 변화하지 않은 채 수십년간 신물나도록 보아온 이전투구와 직무유기만을 답습하며 긴 여름을 허송했고, 기업들은 비용줄이기에만 정도이상의 열의를 보일뿐 정작 체질개선이나 구조조정, 기업관행개선 등의 근본적 요구에는 완강히 버텼다.
공무원들의 무책임, 무소신도 개선된 조짐이 안 보이고, 검찰의 수사관행조차 속시원히 바뀐게 없다. 나만 챙기기, 편가르기 등에 여전히 집착하는 일반국민들의 의식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땀 흘리지않은 여름을 보낸 셈이다. 때를 놓치고 나서 한 겨울에 땀을 내려면 휠씬 많은 힘이 들고 수확마저도 신통치않다는 걸 몰랐던 것일까. 이래저래 모진 여름을 보내는 마음은 대책없이 심란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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