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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政 50년 기념물(金聖佑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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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政 50년 기념물(金聖佑 에세이)

입력
1998.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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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상자가 있다. 나무로 만들었고 사람이 걸터앉기에 알맞는 크기다. 위판에 구멍이 가로로 뚫려 있어서 무엇을 집어넣을 수는 있으나 열쇠로 옆문을 열기전에는 안에 든 것을 끄집어 내지는 못한다. 이 상자 속에 지금 귀중품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상자를 열면 그 귀중품이 요귀가 되어 온갖 재앙들을 몰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니 상자를 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부로 내버리지도 못한다. 버리면 또 무슨 책망이 어디서 쏟아질는지 모른다. 난감하게 되었다. 이 상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이 상자의 비극이다. 그냥 내버려둔다면 언제까지일 것인가. 그 운명을 점칠 수 없는 것이 이 상자의 불운이다. 이 상자는 1998년 3월2일 국회가 국무총리임명동의안을 표결한 투표함이다.정확하게는 투표함이 2개, 명패함이 2개, 이렇게 상자가 모두 4개다. 이 투표함은 그날 국회의원 201명이 투표를 끝난 상태에서 여당측 의원들의 저지로 더 속행을 못하고 보존신청된 것이다. 지금 국회 본회의장의 비품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지난 17일 국회는 이 투표함속의 표들을 그대로 둔채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새로 투표하여 통과시켰다. 의정 50년사상 처음 보는 기상천외의 의사진행이다.

이날 국회에서는 투표에 앞서 몇몇 의원들의 의사진행발언이 신청되어 있자 박준규의장은 『지금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온갖 뭉친 문제들이 다 터져나온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결과적으로 당장은 재앙을 면했다고 해서 그 판도라의 투표함을 그냥 덮어버린 것이 옳았던 것일까. 투표함의 밀봉으로 사태가 미봉될는지는 몰라도 사건이 완봉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진행발언에 나선 이신범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 헌정사에 부끄럽고 슬픈 날로 기록될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법절차에 따라서 정당하게 실시한 투표를 덮어놓고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면서까지 재투표를 강행한다는 것은 법치주의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미명아래 국회 스스로 헌법과 국회법을 무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국민에게 법을 준수하라고 한다면 누가 법을 지키겠는가. 우리는 3월2일의 투표함을 개함하거나 투표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투표를 하려면 임명동의안이 철회되고 다시 제출되어야 한다. 박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에 보낸 공한에서 「다시 요청하오니」라고 한 것을 재제출로 해석했으나 이것은 대통령의 국법행위는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만 하도록 되어 있는 헌법 제82조의 위반이라는 것이고, 정부가 국회본회의에 제출한 의안을 철회할 때에는 본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국회법 제90조의 위반이라는 것이다.

위헌이 됐든 위법이 됐든, 국회가 재투표에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보존신청된 투표함이 유효인지 무효인지, 이 투표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국회는 결국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어차피 여야가 정치적으로 합의한 마당이라면 대통령이 총리임명동의안을 공식 철회하고 재제출하든지 했어야 옳았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고해서 피해간다면 그 옆길에서 만나는 법적부담은 어쩔 것인가. 법을 만드는 국회로서는 위헌, 위법이 더 무서운 것이다. 정치적 타결은 법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안이하고도 위험한 생각은 국회의 자기 모독이다. 법을 경시하는 국회는 스스로를 경시하는 것이다.

참으로 궁금하다. 열지 못한 투표함은 앞으로라도 언제 열릴 것인가. 끝끝내 우리국회의 영구적 미료(未了) 안건으로 남고야 말 것인가.

지금 모든 분야에서 개혁이 외쳐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정치개혁이 맨 먼저라 하고 정치개혁의 1순위는 국회개혁이라고들 한다. 개함할 수도 없고 폐기할 수도 없는 영원히 입다문 벙어리 상자는 문닫을 수도 없는 우리 국회의 자화상 같은 것이다. 때마침 정부수립 50주년의 8·15직후 재투표로 미아가 된 이 투표함은 내내 국민의 지탄으로 얼룩진 우리 의정50년의 상징물이 될 것이다. 영영 열 수 없다면 창고속에 처박아 숨겨둘 일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국회를 경각시키는 기념물로 의사당 홀에 덩그러니 모셔지는 편이 낫다. 아니면 국립박물관에 국회사를 증언하는 문화재로 전시되는 것은 어떨까. 국회의 투표함은 이 투표함이 갇혀버리자 새 투표함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 헌정사의 손때가 묻은 이 투표함 자체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도 없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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