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보루’‘권력 시녀’ 두얼굴/지역편중 심해 호남출신은 없어/朴 전 대통령 신임 신직수씨 최장수/盧정권때 임기제 첫 도입/YS정부때 4명중 3명 도중 하차/현정부 일단 “검찰 중립화” 의지검사(檢事)는 힘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상징이다. 죄지은 사람을 조사해 벌 주는 권한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벌을 줄지 말지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검찰총장은 이처럼 막강한 검사들중 최고의 자리이다. 법은 「검사는 하나」임을 명문화하고 있다. 이른바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다. 이는 곧 검찰총장의 뜻이 전체 검찰의 뜻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건에서 개개 검사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검찰총장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검찰이 사정(司正)의 중추라면 총장은 중추신경을 다스리는 두뇌에 해당한다.
그러나 검찰총장은 이처럼 큰 권한을 갖고 있는 만큼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치권력은 항상 검찰의 힘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했고, 검찰 또한 정치권력의 요구에 굴복하기 일쑤였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던 이유이다.
때문에 정치권력은 당연히 검찰총장에 자신의 심복이나 믿을 만한 사람을 앉히려 했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朴正熙)정권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63년12월 11대 총장에 취임한 신직수(申稙秀)씨. 신씨는 박 전대통령의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지낸 인물로 박 전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불과 36세에 검찰총장에 올랐다. 재임기간도 무려 7년6개월로 전무후무한 장수기록이다. 신총장은 퇴임후에도 법무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박 정권때에는 청와대와 군(軍), 중앙정보부(중정)를 정점으로 하는 절대권력이 전횡을 휘두르던 때였기 때문에 검찰조직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다. 절대권력의 충실한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중정차장을 거쳐 검찰총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11대 신직수, 13대 김치열(金致烈), 15대 오탁근(吳鐸根) 총장이 그러했다.
출신지역의 편중이 심해진 것도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유신독재가 기세를 떨치던 73년12월 취임한 13대 김치열 총장이후 14대 이선중(李善中), 15대 오탁근 총장이 모두 대구·경북출신이다. 이러한 지역편중은 5공 이후 더욱 심해졌다. 81년3월 취임한 17대 허형구(許亨九) 총장이후 김영삼(金泳三)정부에서 임명된 27대 김기수(金起秀) 총장에 이르기까지 11명의 총장중 9명이 영남출신이다. 역대 총장 28명을 출신지역별로 보면 이북이 4명, 강원 1명, 서울 2명, 충남 4명, 충북 2명, 대구·경북 6명, 부산·경남 9명이다.
이러한 지역편중은 정치권력과 검찰의 유착관계를 말해주는 실마리이다. 이는 또한 정치인 수사 때마다 표적수사니, 편파수사니 하는 비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총장은 퇴임후 정치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논란이 되기도 했다. 22대 김기춘(金淇春) 총장은 퇴임후인 92년 대선 직전 부산 「초원복집 사건」에 연루돼 기소되기도 했으며, 26대 김도언(金道彦) 총장은 퇴임 직후 여당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야당의 비난을 샀다.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총장의 중도하차냐, 출세보장이냐의 가늠자가 됐다. 5공시절 검찰총장의 부침(浮沈)은 정치권력과 총장의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81년3월 취임한 허형구 총장은 이른바 「저질연탄사건」으로 불과 9개월만에 옷을 벗었다. 불량 연탄을 생산한 업체 대표 3명과 이들한테서 돈을 받은 동자부 공무원을 구속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별것 아닌 사건으로 갓 출범한 정부의 공신력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상(賞) 대신 벌이 떨어진 것이다. 허총장의 후임인 18대 정치근(鄭致根) 총장은 취임사에서 『검찰은 앞으로 위로는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고 장관님을 정점으로 일한다』며 충성을 다짐했으나 5개월만에 법무장관으로 영전한 뒤 「이철희·장영자사건」으로 한달만에 경질됐다. 19대 김석휘(金錫輝) 총장은 대통령의 지시로 수사검사들과 함께 TV에 직접 출연해 이·장사건을 설명해야 했고, 83년에는 대원각주인 외화밀반출 사건과 관련해 부하 검사들이 안기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5공 검찰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은 전두환(全斗煥) 전대통령의 검찰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관련이 있었다는 견해가 많다.
이처럼 검찰이 정치권력에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 88년 노태우(盧泰愚)정권에서 검찰총장 임기제가 처음 도입됐다. 첫 임기제 총장인 22대 김기춘 총장과 23대 정구영(鄭銶永) 총장은 모두 2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 들어서는 4명의 총장중 3명이 임기를 못 채우고 퇴임했으며, 현 정부 출범시에도 총장 교체문제가 관심을 끄는 등 임기제의 명맥은 위태롭기만 하다.
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검찰의 중립성 보장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보장받고 있는 현 김태정(金泰政) 총장이 시대적 요구인 검찰중립화의 과제를 어떻게 구현할 지 주목된다. 최근 『검찰이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는 여당의 불만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검찰이 정치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된다.<김상철 기자>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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