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갈등 두 얼굴 ‘재계 총리’/5·16 축재로 갇힌 기업인 빼내려 이병철씨가 박정희와 담판후 창설/김용완씨 10년간 3공과 밀월/정주영씨 5공 퇴임 압력 맞서 위상 절정/새정부선 “IMF 초래” 개혁대상 몰려한국이 이룩한 고도성장에 정부 못지않게 재계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재계의 총리」로 불리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은 30여년동안 정부와 기업의 중간 조정자로 정책에 대한 대안제시를 통해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고, 모래알같은 재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경유착의 원흉으로 질타와 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파란많은 한국경제사의 한축을 굳건히 지켜왔다.
전경련은 초대 이병철(李秉喆) 회장부터 현 23대 최종현(崔鍾賢) 회장까지 모두 8명의 회장을 배출했다. 최회장의 사퇴이후 전경련을 이끌고 있는 김우중(金宇中) 회장대행까지 합하면 모두 9명이 되는 셈이다.
역대 회장들의 궤적은 곧바로 한국 재계사다. 60년 4·19혁명 이후 기업인들이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기업인들은 자발적으로 올바른 경제윤리확립을 기치로 내걸고 한국경제협의회를 만들었다. 전경련의 모태가 되는 셈이다. 한국경제협의회는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을 모델로 전경련 조직과 사업의 골간을 마련했다.
5·16쿠데타를 계기로 전경련은 보다 구체적인 틀을 갖추었다. 5·16쿠데타 직후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감금된 상황에서 삼성의 이회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만나 기업인들을 풀어주고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는 대신 기업인들이 국가 기간산업을 하나씩 맡아 일으키겠다고 제의했다. 이른바 「빅딜」을 한 셈이다. 박대통령과의 담판을 이끌어냈던 이회장은 당시 풀려난 경제인들을 중심으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었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회장은 1년 남짓한 재임기간동안 미 민간사절단 파견(61년 11월), 울산공업단지조성 건의 등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경제에 신선한 파문을 던졌다.
2, 3대회장을 지낸 대한유화의 이정림(李庭林) 회장은 개성시내 상점의 점원에서 출발해 50, 60년대 국내 시멘트 석유화학공업의 선구자 역할을 해던 인물. 그는 울산공단에 이어 내륙공단으로 처음인 한국수출산업공단(구로공단)설립을 건의하는 등 활발한 정책대안 제시로 전경련의 위상을 높이는데 한몫했다.
삼성 이회장과 대한유화 이회장은 박대통령에게 경제발전을 위한 각종 건의를 하면서 양측간 밀월관계의 기초를 다졌다.
전경련이 정치권과 본격적인 밀월에 들어간 것은 세번째 회장인 김용완(金容完) 회장때부터. 고사를 거듭하면서도 10년간이나 재임, 정주영(鄭周永) 회장과 함께 최장수 회장으로 기록된 김회장은 72년 8·3조치로 불리는 사채동결조치등 3공의 성장정책에 화답하며 재계를 이끌었다.
김회장의 고사로 잠시 재임했던 홍재선(洪在善) 회장은 일제시대 금융조합이사를 지낸 금융계 출신으로 금융과 실물을 접목시키는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김회장의 「대타」에 머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경련의 위상이 크게 제고된 시기는 정주영 회장 시대다. 정회장의 불도우저식 경영스타일은 79년 숙원사업이었던 전경련회관 설립 등 다양한 업적을 쌓았다. 5공초기 정권의 퇴임압력에도 불구『나는 회원들이 뽑아준 회장이라 마음대로 그만둘 수없다』고 버틴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당시가 전경련 최고의 전성시대라고 회상하는 관계자들은 많다.
정회장의 후임인 구자경(具滋暻) 회장은 초대 이회장과 함께 드문 단임회장이다. 재임기간중 6·29를 전후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전경련에 쏟아지는 각계의 비난을 감수해야했다는 점에서 가장 마음 고생이 많았던 회장으로 꼽힌다.
90년대 초반을 이끈 유창순(劉彰順) 회장은 특이한 인물이다. 역대 회장 가운데 유일하게 오너도 전문경영인도 아닌 고위관료출신이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장관, 롯데제과 대표이사를 거쳐 국무총리를 지낸 유회장은 오너가 아니어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회장직 수행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는 고위 관료 출신의 인맥과 경륜을 통해 당시 정권과의 어려운 관계를 무난하게 이끌었다는 평을 듣는다.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의 「학문적 위상」을 높인 회장으로 평가받는다. 최회장은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형 최종건(崔鍾建) 선경인더스트리대표가 세상을 뜨자 급작스럽게 귀국, 회사를 맡게 됐다. 최회장은 회장취임과 함께 연간 5억원에 지나지않던 한국경제연구소의 예산을 20억원으로 늘려 정부에 대한 이론적 대응에 나섰다.
최회장의 와병과 정권교체로 추대된 김우중 회장대행은 사상최대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국가부도 상황의 원인제공자로 재벌이 지목되면서 재벌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굳어졌다. 기획조정실이 해체되고 총수들은 그룹회장의 직함을 버린지 오래다. 재계전체가 개혁의 대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김회장은 개혁의 흐름을 정권과 공동으로 모색하면서 재계의 새위상을 정립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이재열 기자>이재열>
◎회장 선출 뒷얘기/4대 김용완씨 강력 고사하다 최장수
재계의 총리로 일컬어지는 전경련회장은 임기 2년의 선출때마다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그때마다 숱한 하마평이 오르내렸고 거론되는 당사자는 즉각 사양하는 게 관행으로 굳었다. 전경련회장이 재계를 대표한다는 명예보다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궂은 일을 도맡아야하는 고난의 자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대회장 가운데 한번도 공개적인 본인의 뜻에 의해 회장을 맡은 경우는 한번도 없다. 그래서 『전경련회장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할 수 없는 자리도 아니다』라는 불문율은 아직도 유효하다.
전경련 태동의 산파역을 맡았던 이병철 회장은 부정축재로 몰린 재계를 살리려는 일념에서 군부와 담판을 했고 그 대신 평생유일한 대외직함으로 전경련 회장직을 맡았다.
고사의 전통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4대 김용완 회장. 김회장은 재력으로 회장감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고사를 거듭했지만 결국 정주영 회장과 함께 10년간 재임, 최장수 회장이 됐다. 민족자본으로 일으킨 경방의 창업주로 재계의 반목과 질시를 화합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김회장의 고사는 홍재선 회장과 정주영 회장에게 불똥을 튀게했다. 쌍용의 계열사였던 금성방직사장을 지낸 전문경영인 홍회장이 대타역을 잠시 맡았고, 「동네이장도 하지 말라」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평소 별다른 직함을 갖지않았던 정회장도 반강제로 회장직을 떠맡았다. 정회장은 『김회장에게 회장선출을 알리려 전화를 걸었더니 「누굴 죽이려느냐」며 전화를 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회장을 맡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전경련회장이 외압에 의해 결정되는 자리도 아니다. 정부측이 개입하려했던 두차례의 회장 선출 개입시도가 모두 좌절했을 정도다. 3대 회장 선거에서 정부측은 이정림 당시회장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했지만 전경련은 경선을 통해 정면돌파했고, 서슬퍼런 5공시절에도 정부는 정주영 회장을 교체하려고 했지만 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정회장을 재추대, 외풍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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