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共땐 ‘비서’ 3共후 ‘실세’/박정희권세 업고 이후락·김정렴 ‘막강’/5共 3許 득세땐 김경원·이범석 ‘미미’/역대비서실장 21명 영남출신이 절반/서울대 43% 연·고대 29% 육사출신은 1명뿐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파워 엘리트는 국가운영을 주도한다. 그들의 행태는 국민의 구체적 삶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실세집단, 이른바 힘있는 자리는 무엇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이 그 자리를 거쳐갔나. 한국일보는 건국 50주년 특별기획 「한국의 파워 포스트(Power Post)」 시리즈를 통해 이런 궁금증을 풀어 본다.
청와대비서실은 흔히 「권부(權府)」 「소(小)내각」으로 불려지며 비서실장은 「급은 장관, 힘은 총리이상」 「소통령」의 위상을 굳혀왔다. 역대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비서실을 통해 국정의 흐름을 파악하고 각 부처를 관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파워는 권력자와의 지근거리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비서실장은 매일 대통령을 대하기 때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직제상 비서실장은 청와대의 입법, 행정, 사법과 관련된 보좌기구를 총괄하는 핵심포스트이다. 청와대 비서실은 공직기강을 감독, 지도하는 사정기능과 공직자의 임명에 필요한 스크린기능까지 갖고 있어 비서실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1, 2공화국과 10·26 이후의 과도기를 제외하고 대다수 비서실장이 권력자로 기능해왔다.
비서실장의 위치가 중요한 탓에 대통령도 신뢰할만한 인물을 발탁했다. 60년대 이후 영남출신 집권자들은 신뢰성을 담보하는 방편으로 자기 지역출신을 비서실장에 발탁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지역갈등의 단초이다. 역대 비서실장 21명중 대구·경북출신이 4명, 부산·경남출신이 7명으로 영남출신이 절반을 웃돌고 있다. 나머지는 서울 6명, 강원 평남 함남 각 1명이었으며 호남출신은 전무했다. 구체적으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 5명중 영남출신은 2명이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때는 7명중 4명,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때는 3명중 2명,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때는 4명중 3명이 영남출신이었다.
출신지역이 편중된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도 서울대 출신이 43%나 되며 연·고대가 29%로 파워엘리트의 명문대 독식현상이 두드러진다. 육사출신은 1명에 그쳐 비서실장 인선에는 어느 정도 전문성이 중시됐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비서실장은 1, 2공화국 시절의 경우 오늘날과 달리 참모, 보좌기능보다 단순히 비서기능에 그쳐 그야말로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가부장적 권위를 지닌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은 경무대 비서실을 행랑채로 취급했다는 평이다. 경무대 비서실장은 이기붕(李起鵬) 고재봉(高在鳳)씨로 기록돼 있다. 2공화국때는 권력체제가 의원내각제였던 탓에 비서실장은 제한적 역할만 했다.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이재항(李載沆)씨도 역할은 미미했다.
4공화국과 5공화국의 과도기때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의 최광수(崔侊洙) 비서실장도 권한과 역할이 미미했다. 당시 권력이 사실상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본격적으로 체제를 갖춘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3공화국. 박전대통령이 장기집권의 절대적 권력자여서 비서실장의 힘도 대단했다. 재임기간도 길어 이후락(李厚洛) 실장이 5년11개월, 김정렴(金正濂) 실장이 9년3개월이나 됐다. 그러나 박전대통령은 특유의 견제와 균형의 인사로 비서실장에 너무 힘이 치우치지 않도록 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의 권한이 더 컸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5공화국은 군사쿠데타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통치가 불가피했다는 점에서 청와대 비서실의 역할이 강했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기능이 축소됐다. 주목할 대목은 비서실장의 권한은 비서실의 역할과 반비례했다는 점. 개혁주도세력으로 불리던 「3허(許)」 등 실세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초기에는 김경원(金瓊元) 이범석(李範錫) 함병춘(咸秉春) 실장은 전문조언자의 영역에 머물렀다. 이어 강경식(姜慶植) 이규호(李奎浩) 박영수(朴英秀) 김윤환(金潤煥)씨가 비서실장을 맡았으며 후반기로 갈수록 권한이 확대됐다.
6공화국때는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지고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스타일의 정치」를 추구, 초기 비서실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여소야대로 인한 정권의 취약함, 노사분규등 사회불안이 가중되면서 후반기로 가면서 비서실과 비서실장의 역할은 증대됐다.
YS정권에서는 중량급인 박관용(朴寬用) 의원이 실장을 맡았을 때 비서실장 중심으로 청와대 비서실이 운영됐다.
그러다 현철(賢哲)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이 정치현안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한승수(韓昇洙)씨 등 그 이후의 비서실장들은 제한적 역할에 머물게 됐다. 그래서 김광일(金光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간의 갈등설이 나오기도 했다. 김용태(金瑢泰)씨는 YS정권의 말미를 장식하는 역할만 해 97년 대선때 북풍공작을 주도한 안기부가 통제범위를 벗어나는등 일종의 레임덕을 겪기도 했다.<이영성 기자>이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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