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초기 군주제와 귀족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이론과 지침은 성직자이며 헌법이론가인 에마뉘엘 시에예스로부터 나왔다. 그는 소르본느에서 성직자 교육을 마치고 교회직을 가졌으나 귀족출신이 아니었던 탓에 고위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귀족정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시에예스는 41세가 되던 1789년 1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 한권을 발간했다. 이 책자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시민혁명의 지침서가 됐다.그가 책자를 발간한 때는 귀족 및 성직자와 제3신분, 즉 인민들로 구성된 삼부회의의 조직에 대해 공개적 논쟁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시에예스는 이 책자에서 제3신분을 특권을 갖지 않은 프랑스 국민들로 규정하고 이들만이 새로운 헌법을 입안할 권리를 가진다고 공언했다. 그가 주창한 것은 인민주권의 개념이었으며 이는 바로 왕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책자발간 후 몇달이 안된 그해 5월 삼부회의에서 제3신분회대표로 선출됐다.
제3신분회 대의원들은 자신들이 프랑스국민들을 위해 법을 제정할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했다. 그해 6월 제3신분회는 스스로를 국민의회로 선포하고 나섰고 이는 곧 혁명의 시작이었다. 왕은 당연히 이들과 국민의회의 합법성을 부정했으나 혁명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대의원들은 시에예스의 주도 아래 왕에게 굳게 대항했다. 국민의회는 이후 몇달간 봉건제를 폐지하고 왕의 특권을 제한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는 등 제도혁명을 밀고 나갔다.
요즘 우리시민단체들의 정치감시활동을 보면서 시에예스를 떠올려 보았다. 시에예스의 제3신분은 바로 시민들이고 의회주의나 민주주의도 시민개념에 입각한 주권재민 사상에서 출발했다. 국회의원의 활동상을 밀착감시하겠다는 기독교윤리실천위나, 의원세비 가압류신청을 주도한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국민소환제를 입법청원 하려는 서울YMCA 등의 활동은 시민의 정치적 존재를 확인하려는 외침으로 들린다. 의원들이 놀기만 하니 시민들이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