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부의 사정(司正)원칙이나 방침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정치인 비리 사정」이 특히 그렇다.청와대는 이달 초 정치인 비리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을 예고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정치인 비리의혹에 대해 진상을 조사하고 사법적으로 철저하게 규명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부터다. 아마 김대통령이 정치권 사정에 대해 이처럼 분명히 언급한 것은 취임후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좀 의아스럽다. 그동안 끊임없이 나돌던 정치인 비리설로 보면 대통령의 지시는 분명히 앞으로의 비리 보다는 「과거의 비리」를 겨냥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조사·수사를 안했다는 것인지, 해왔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으니 이제부터 더 강도를 높인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사실 김대중 정부는 출범초부터 정치권 사정에 대해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김대통령은 김영삼(金泳三)정부가 정치보복이니 표적사정이니 하는 비난을 받은 것을 의식한 듯 「인적 청산」을 통한 개혁에 거부감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아예 앞선 정권들이 사정의 사령탑으로 두었던 청와대 민정(사정)수석 자리도 없애버리는 「결벽성」을 보였다.
전략적으로는 출범초부터 정치인 사정에 손을 댔다가 아무래도 비리 연루자가 상대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여권, 즉 지금의 야당의 반발을 사 전선(戰線)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려 했을 수 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국회 소수파 정권이 정치 상황과 타협했음에 다름아니다. 사정은 성역없는 수사다. 비리가 있으면 당연히 파헤쳐야 한다. 그런데 이 원칙이 일찌감치 훼손됐다.
김대통령이 대선공약대로 정부 출범직후 경제청문회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검찰수사가 이뤄져 경제실정 책임자를 단죄하는 수순을 밟았다면 그후의 사정작업은 어땠을까. 첫 단추를 그렇게 뀄는데도 종금사 인허가 비리, 기아 비자금,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 한국통신의 대선자금 지원, 청구 비리, 한국부동산신탁과 경성그룹이 얽힌 특혜대출 비리 등 그 많은 정치인 연루의혹 사건 수사가 지금처럼 지지부진 했을까.
그러다보니 정치권 사정설은 여권의 정국운용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대통령의 언급이 있기 전에도 정치권 사정설은 여권에서 심심찮게 흘러 나왔다. 『야당의 발목잡기에 더 이상 끌려 다닐 수 없다』『대통령이 너무 참는 것 아니냐』 등의 얘기와 함께. 그러다 조금 있으면 『혐의가 드러난 정치인은 없다』는 말이 나오곤 했다.
최근에 나온 대대적인 정치권 사정 방침도 경성비리 관련자로 여권 인사들이 거명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당혹감과 여론에 떠밀려 나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7·21 재·보선 결과를 보고 정치권만 성역으로 남아 있는 데 대한 민심의 이반을 읽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국민들은 기대와 함께 의구심을 갖는다. 왜 이제서야 부산을 떠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 정부의 정치권 비리 사정은 출발과 지금까지의 과정이 좋은 점수를 줄 만한 게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지금이라도 안다면 늦은 게 아니다. 우선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이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정치권 사정은 비리 정치인을 처벌하기 위해서이지, 정계개편 같은 정국 운용의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구호처럼 외치는 끓는 냄비식 사정이 돼서도 안된다. 그리고 당연히 형평이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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