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망해도 지원없다” 李 수석 파문/놀란 일본계 은행들 “대출금 갚아라” 국내銀 압박/현철씨 비켜가기 수사 비판에 중수부장 전격경질/‘정태수리스트’ 국회 청문회도 진실규명 역부족국회 한보청문회가 한창 기세를 떨치던 97년 4월8일, 서울구치소 청문회장. 다소 부은듯한 얼굴에 푸른색 수의를 입고 김종국(金鍾國) 전 한보그룹재정본부장이 증인석에 나왔다.
목소리가 유난히 큰 국민회의 이상수(李相洙) 의원이 다그치듯 물었다. 『증인, 한보사태는 왜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김 전본부장이 입을 떼었다. 『한보가 「자연사」(自然死)냐 「타살」(打殺)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반반(半半)인 것같습니다』
당시 김 전본부장이 선문답(禪問答) 같은 말은 「정태수 리스트」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한보사태는 「부실기업은 퇴출되어야 마땅하다」는 「경제법칙」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터진 것이라는 의혹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한보사태를 전후해 한보에 연루된 정치권과 은행장들이 보여준 허둥거리는 모습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한 타살의 흔적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준비없이 터진 5조원의 「한보폭탄」은 1년뒤 국가부도라는 핵폭탄의 뇌관을 때리는 기폭장치로 작용했다.
한보사태 20여일뒤인 97년 2월12일, 신한국당 당무회의실. 민주계 핵심실세인 김덕룡(金德龍) 의원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발언을 시작했다. 『나를 둘러싸고 뭔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마녀사냥과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언론에 내 이름이 거론되는 경위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구석이 많습니다. 한보사태로 곤경에 빠진 특정세력이 반사이익을 취하기 위해 수사과정을 악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김의원은 당시 일부 언론을 통해 「검찰수사결과 한보비자금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정치적 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김의원의 이날 발언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해명성격이 짙었지만 「한보사태로 곤경에 빠진 특정세력」이라는 부분은 해석여부에 따라서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賢哲)씨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C씨의 증언.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음모론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상황을 이끄는 「컨트롤 타워」가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검찰이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에 쉽게 내동댕이쳐질 수 없는 거물급 의원들의 수뢰설이 언론에 오르내린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계속되는 C씨의 회고. 『한보 리스트를 누가, 무엇때문에 언론에 흘리고 있느냐와 관련해 현철씨 배후설, 민주계 권력투쟁설, 한보 자작설 등 다양한 해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가장 설득력을 얻었던 것은 현철씨 배후설이었습니다. 엉겁결에 부도를 낸 한보사태의 파장이 부메랑식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오자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한계선상의 인물들을 가지치기 했다는 것이 현철씨 배후설의 핵심이었는데 거명된 정치인중 상당수가 대출외압규명이라는 검찰수사의 본류와 상관없이 선거자금 수수 등 지류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증을 굳게 했습니다』
실제로 검찰이 정태수(鄭泰守)씨의 진술을 통해 확보한 연루정치인의 정확한 숫자는 56명선. 이중 언론에 일방적으로 거론된 사람은 20여명이나 되는데 국민회의 김상현(金相賢) 권노갑(權魯甲) 의원과 이철용(李喆鎔)씨를 빼면 나머지는 한결같이 신한국당 권력핵심자들이었다. 특히 97년 4월11일에는 김수한(金守漢) 국회의장 김윤환(金潤煥) 의원 서석재(徐錫宰) 의원 등 거물들의 수뢰사실이 보도되는 등 한보사태가 여권내의 권력투쟁 양상으로까지 치달았다.
정치권의 준비없는 한보처리 과정에서 권력의 충실한 집행자를 자임하던 검찰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특히 2월말 종결된 1차 한보수사가 사실은 현철씨에 대한 면책성 수사에 불과했다는 국민적 비판이 일어나면서 중수부장이 전격적으로 경질되는 등 엄청난 풍파에 시달려야 했다.
어쨌든 정치권에 난무한 「정태수 리스트」의 출처는 이후 검찰수사와 국회청문회를 통해서도 규명되지 않은채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됐다. 다만 한보사태를 전후로 벌어진 여권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여권의 대선구도가 크게 뒤흔들렸고 결국 대선패배로 연결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한보사태의 최대 정치적 피해자는 신한국당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보사태에 대한 경제적 측면의 부실수습은 온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상당수는 경제YS로 불리던 이석채(李錫采)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돌아간다.
97년 1월29일, 이수석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석채 쇼크」로 이름붙여진 엄청난 발언을 하게 된다. 다음은 당시 이수석의 발언. 『한보사태로 제일은행 등 채권은행단이 막대한 부실채권을 안게 됐지만 과거처럼 한은특융 등 특별지원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방침입니다. 한보사건을 그릇된 금융관행 타파의 계기로 삼아 은행의 책임경영체제가 확립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은행이 망해도 정부지원은 없다」라는 원칙을 선언한 것이다.
이수석의 계속되는 발언. 『과거 관치금융시절에는 정부당국이 은행대출에 간여했기 때문에 관련은행에 한은특융 등의 지원조치가 취해졌고 관련 임직원들도 보호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보철강 대출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은행 자체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만큼 관련은행에 대한 지원조치는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97년 내내 부실은행의 대명사로 떠오른 제일은행의 외화차입이 사실상 중단되는 순간이었다.
「부실은행은 망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경제법칙을 재확인한 「이석채발언」은 곧바로 엄청난 쇼크로 돌아왔다. 가뜩이나 국내은행들의 국제금융시장 신용도가 내려가고 있는 판국에 『은행에 대한 한은특융은 불가능하다』는 이수석의 발언이 확대해석되면서 일본계 은행을 중심으로 한국계 은행에 대한 대출금회수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제일은행 국제부 관계자의 증언.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긴 곳은 3월말 결산인 일본쪽이 었습니다. 이수석의 발언이 전해지면서 일본측 거래은행마다 꿔간 돈을 갚으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일부 만기연장을 해주는 은행들은 프리미엄을 요구했습니다. 「이석채 발언」의 피해규모가 「100억달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사태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2월초에는 일본 중앙은행이 직접 한국정부의 공식해명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국제 금융관례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결국 사태수습에 총대를 매고 중앙은행의 총수인 이경식(李經植) 한은총재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현재로는 한은특융을 거론할 상태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한은특융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부실은행 지원없다」는 원칙이 불과 열흘만에 뒤바뀌는 순간이었으며 한국 금융산업의 몰락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수석은 왜 평생동안 자신을 괴롭힐 자충수를 두었던 것일까. 한마디로 정확한 상황판단 부족때문이었다. 이수석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치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보철강 부도는 국제그룹 정리와 똑같다. 그런데 왜 국제그룹은 정부가 「탄압」했다고 하고, 한보철강은 「특혜」를 주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랬다. 이수석은 97년 한국경제를 국제사건이 터진 85년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또 그렇게 대처했던 것이다.
한보사태의 책임을 지고 이수석은 물러났지만 한국경제의 비극은 이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조철환 기자>조철환>
◎본말전도된 검찰수사/특혜대출 주연엔 관대/조연들은 혹독한 처벌
검찰의 한보수사도 졸속이기는 마찬가지다. 검찰은 「성역없는 수사」를 강조하며 한보사태가 터진지 20여일뒤인 97년 2월14일, 1차로 관련 정치인과 은행장 등 8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구속자중 대출특혜와 관련된 「주연」(主演)격 정치인들은 관대한 처분을 받은 반면 「조연」(助演)역할을 한 사람들은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본말이 전도된 수사였다.
검찰이 한보 특혜대출의 배후로 지목해 구속한 신한국당 홍인길(洪仁吉) 황병태(黃秉泰) 정재철(鄭在哲) 의원에게 적용된 죄명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의 알선수재 혐의. 법정형이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되어있다. 법정에서 국회의원 신과 국가에 대한 공헌도를 주장할 경우 재판부의 작량경감 등을 통해 형량이 3년이하일 경우에만 가능한 「집행유예」 선고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정감사때 한보관련 질의무마와 해안도로 건설 등과 관련된 편의제공 등의 대가로 금품을 받은 국민회의 권노갑(權魯甲) 의원과 김우석(金佑錫) 전 내무부장관에게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가 적용됐다. 이 죄는 무기 또는 10년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돼 있어 판사가 작량경감을 통해 형량을 깎아줘도 집행유예가 불가능, 실형선고가 불가피했다.
검찰의 수사내용과 법적용에도 의아한 대목이 많았다. 홍의원의 경우 96년 이전의 대출이나 인·허가 관련혐의는 밝혀내지 못했고, 정의원과 국회재경위원장이던 황의원의 경우 정태수(鄭泰守) 총회장에게서 여당의원들을 상대로 국감질의 무마청탁이나 금품을 받은 사실이 없다며 직무관련성을 소극적으로 해석했다. 반면 국민회의 권의원의 경우 국방위 소속인데도 소속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포괄적인 직무관련성을 인정해 뇌물죄를 적용했다. 결국 검찰수사대로라면 한보는 야당의원들에게만 국감로비를 했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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