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달력은 8월이 정월이다. 8월은 새로운 시작의 달이다. 광복의 8·15와 건국의 8·15가 있는 달이다. 더구나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50주년을 맞는 해요, 그 8·15가 다가온다.지난 50년의 우리 역사는 기구했다. 건국 초기의 혼돈이 있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고 폐허속의 빈곤이 있었고 반민주의 독재가 있었으나 그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온 반세기였다.
우리의 현대사 50년은 세계사의 500년과 길이가 같다. 일제 치하는 우리의 중세였다. 어두운 중세가 르네상스로 밝아오듯이 해방과 함께 우리의 역사는 새 광명을 찾았다. 그 이래 절대군주 대신 절대독재에 대한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전혀 생소하던 민주주의가 어느만큼 정착했다. 경제적으로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제는 정보사회의 동시대에 와 있다. 우리의 건국사는 축시(縮時)의 역사였다. 그만큼 구보(驅步)의 역사였고 고성장의 역사였다. 자랑스러운 50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속성(速成)은 콩나물처럼 멀쑥하게 키만 자라게 했다. 경제성장의 속도에 정치발전도 사회정의도 시민의식도 따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키는 맑은 물로만 자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장사는 백과 사바사바와 새치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키워왔다. 우리의 국부(國富)는 부정축재의 부나 다름 없다. 부끄러운 50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국 50년을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인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인가. 대한민국 50년사는 긍정의 역사인가, 부정의 역사인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자면 그 평가부터 정리하고 정립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올해의 8·15를 계기로 「제2의 건국」을 하자고 한다. 「제2의 건국」은 조금도 새로운 구호가 아니다. 역대 정권들이 역사의 고비마다 걸핏하면 외쳐온 상투어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의 신호요 새로운 도약의 구령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지난 역사에 대한 부인이 들어있다. 역사를 잘못 창조해왔으니 처음부터 다시 창조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실패의 역사였으니 재건하자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50년은 재건과 재건의 연속이었다.
건국이래 역대 대통령들의 종말이 불행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불행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집권자들은 모두 전임자들의 치정을 부정해왔다. 우리의 정치사는 줄줄이 전비(前非)의 역사였다. 정권의 정통성과 전통성을 스스로 토막냈다. 「역사 바로 세우기」라 하여 역사의 이름으로 역사를 단죄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역사의 해체였다. 이렇게 우리의 건국사는 역사가 수난해 온 역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50년의 무엇을 경축하겠다는 것인가. 무슨 승리를 찬양하고 무슨 영광을 찬미하여 거리마다 태극기가 나부끼는가. 우리는 그러면서도 나라의 발전을 자축하고 싶고 겨레의 역량을 자부하고 싶다. 이 모순이 우리 건국사의 딜레마다.
나라를 일으킨 한강의 기적은 시해(弑害)된 역사의 성과요, 민족의 의기를 고취시킨 서울올림픽의 환희는 수감(收監)된 역사의 업적이다. 민주화의 승리도 결국은 독재가 일군 경제발전이 지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영욕(榮辱)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난 50년은 단기적인 역사의 척도로는 나라가 일어선 과정이지만 장기적인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의 과도기였다. 지름길로 달려온 편법의 역사였다. 지름길은 항상 정도(正道)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적 난국은 바로 지난 50년의 비도(非道)가 침전물로 퇴적된 탓이다. 지금까지 나라를 이끌어 온 모든 분야의 구조적 모순이 쌓여 나라의 혈류를 경색시킨 것이다. 이제 지난 반세기동안 건국해온 방식으로는 나라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오늘의 위기는 그런 경고다. 건국 50년에 때맞춘 대전환의 신호다. 절호의 전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다 죄악시하지는 못한다. 독재와 부정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진 우리의 건국사라 해서 지금 그 50년의 과정을 깡그리 부정만한다면 그 성취를 치켜들 면목이 없어진다. 옳은 길은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는 상황 인식으로 역사와 화해하지 않고는 우리 건국사가 서럽다. 좋건 싫건 우리 스스로가 걸어 온 길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조국의 현대사다. 어느 나라나 오점 없는 국사(國史)는 없다. 국사에 대한 애정이 없는 나라는 전진의 깃발이 펄럭이지 않는다. 이것이 대한민국 50년을 경축하는 의미다.<논설고문>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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