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제는 돌발사태 아닌 러 누적된 소외감 폭발한것 섣부른 감정대응 위험천만”지난 해의 일이다. 한러포럼을 준비하면서 주한 러시아대사를 만나 사전논의를 한 적이 있다. 큰 행사를 앞두고 친분도 다지고 허심탄회하게 양국의 사정을 이야기 할 요량으로 식사를 겸한 만남을 제안했다. 그런데 러시아대사관측이 이 사소한 식사자리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러시아대사관측 실무자의 한국어 실력이 완벽했다. 예의바른 한국어 존대말로 시종일관 대화를 주도했으며, 하루 전에 담당자가 음식점을 직접 방문하여 좌석배치에서 식단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러시아 외교진의 철두철미함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외교관 맞추방 사건과 이를 해결하기위해 마닐라에서 열린 한러외무장관 회담이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외신들은 이번 회담을 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라고 손을 들어주었고 국내에서도 시종 러시아측에 끌려다닌 우리측의 외교력 부족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다.
한러 수교 이후 비교적 순항해 왔던 양국관계에 갑작스런 비상신호가 울린 것에 대해,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불거진 한러 외교문제는 순간적인 돌발사태가 아니다.
현 러시아 외무부 장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다. 그는 1989년에 러시아의 두뇌집단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의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듬해에 체결한 한소 수교(당시 러시아는 소련)를 막후 성사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도 프리마코프 장관이 옐로 카드를 든 최초의 장관으로 돌아선 데에는 그만한 곡절이 있다.
첫째로, 한러수교가 성사된 시점은 지구촌에 냉전 종식의 해빙기가 시작된 때였다. 6·25 전쟁 이후 멀기만 했던 러시아와 공식적인 수교를 맺고 나자, 우리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에서 한러수교를 지지했던 지한파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이들의 한국에 대한 열의와 관심은 지난 8년 동안 불신과 실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방문했다가 어이없는 대우를 받고 돌아간 러시아인사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한국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둘째로, 수교 이후 양국의 대사 파견 과정에서 미묘한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4명의 주한 러시아 대사를 임명하면서 외무부 차관 2명을 기용했다. 반대로 우리측에서 파견한 주러대사는 이들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한국의 4강(미·일·중·러) 대사 선임의 잣대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4자 회담에서 러시아가 제외된 사실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함께 한국분단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6·25전쟁을 전후로 남북한 문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남한과는 공식수교를 맺은 상황에서 협상테이블에서 제외된 것은 적잖은 불쾌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한러 경협 및 차관문제, 민간외교 실패 사례등 이번 사건의 배경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가 중국처럼 남북한 등거리 외교로 전환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국가와 국가간의 외교는 그 속성상 단순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뀌고, 양국의 현안이 달라질 때마다, 상대국에 대한 외교방식이 뿌리 채 흔들린다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용도 함께 곤두박질치게 된다.
우리는 러시아가 한반도의 전쟁방지와 평화정착을 위해서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방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세종대 정보통신대학원장>세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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