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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환상(문민정부 5년: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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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환상(문민정부 5년:45)

입력
1998.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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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실 검증없이 “OECD 가입하라”/일부 “뱁새가 황새좇기” 반대속 정치적 결정/OECD선 “자본시장개방 1년내 해라” 압력/“규제는 惡” 종금사 등 위험한 게임 방치도김영삼(金泳三) 정권이 출범한 93년 2월말 경제기획원 대외조정실. 청와대로 부터 은밀한 지시가 전달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해 총대를 메라는 것이 그 내용.

박재윤(朴在潤) 경제수석을 통해 문건도 없이 구두로 내려온 긴급지령을 전해들은 직원들은 크게 술렁였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고, OECD 가입의 득실에 대한 검증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선봉장 노릇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선진국 환상」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청와대를 필두로 경제기획원 외무부 재무부 등 관련 부처들은 OECD 가입을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대외조정실에서 일했던 인사의 회고. 『OECD 가입은 자국이 선진국임을 국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위험부담을 놓고 정부내에서도 이견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YS가 집권 이후에는 답이 정해졌기 때문에 OECD 가입의 득실에 관한 논의가 사실상 금지됐습니다. 정치적으로 결정된 대통령 지시사항이었기 때문이지요』

OECD 가입 논란은 그 역사가 꽤 길다. 이미 80년대말부터 가입여부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으나,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여론에 밀려 자취를 감추곤 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말기에도 7차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세우면서 OECD 가입을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그러던 것이 YS가 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대선공약으로 OECD가입을 들고 나왔다. 당시 YS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의 증언. 『캠프내에서 별다른 이견없이 OECD 가입을 선거공약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지요. 대통령 당선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OECD 가입이 국내경제에 미칠 여파에 대해서는 논의가 거의 없었습니다. OECD 가입 공약이 표를 얻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계속된 증언. 『당시까지도 OECD 가입에 대한 재무부 등의 반대기류가 여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개도국이기 때문에 선진국임을 자처할 경우 불이익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때문에 OECD 가입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집권초기의 강력한 파워로 밀어붙이게 됐지요』

그의 말대로 문민정부는 집권 직후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건너뛰기 위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OECD가입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직 진행중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득보다는 실이 더 컸다는 시각이 압도적이다.

일각에서는 OECD 가입이 환란(換亂)의 「원인」(遠因)을 제공했다는 시각이 여전히 팽배하다. OECD 가입은 뱁새가 황새를 좇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YS캠프가 고지(高地)를 정하자 상황은 급반전했다. OECD 가입의 최대 관건은 금융시장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하는 작업. 이를 위해 폐쇄체제에 길들여져 온 국내 경제에 개방체제로 바꾸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어느 것부터 내주어야 하는지 부터 점검에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암담했습니다. 물론 당장은 아니지만 그들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2000년께까지는 국내 금융시장을 사실상 완전개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어서 국민들에게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YS 집권초기부터 OECD 업무에 가담했던 인사의 증언이다.

그의 계속된 설명. 『가입신청을 하기 전까지 OECD측과 수시로 접촉했으나 당시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점이 적지 않았습니다. 2001년까지 단계적으로 자본시장을 개방하겠다는 플랜을 제시하자 OECD측은 이를 1년안에 마쳐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기도 했지요. 이 때문에 실무자들은 OECD 가입을 유보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결국 95년 3월29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OECD 사무국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이후 같은해 9월까지 주요 회원국과의 비공식협상이 진행됐고, 10월부터는 OECD와 공식협상을 시작했다.

OECD 가입작업이 급진전되는 동안 국내 경제는 이미 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과소비가 판을 치고 해외여행이 붐을 이루면서 93년 5억7,000달러에 머물렀던 여행수지적자는 OECD 가입을 신청한 95년에는 11억9,000달러로 늘어났고, 96년에는 26억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경상수지적자도 94년 38억달러에서 95년 85억달러, 96년에는 230억달러로 급증했다. 당시의 쓰고보자는 행태를 모두 OECD 때문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부가 앞장서 선진국 환상을 불어넣은 결과라는 지적을 부인할 수만은 없다.

정부는 OECD와의 협상과정에서도 실기를 거듭했다. OECD와의 가입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든 96년 3월. 우리측 협상대표였던 신명호(申明浩) 재정경제원 2차관보가 돌연 주택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쟁은 한창인데 장수가 바뀐 것이다. OECD측으로 부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이 터져나왔고, 이때문에 협상이 한동안 지연됐다. 문민정부의 더 큰 과오는 OECD 신드롬에 심취해 종금사를 비롯한 금융부문의 위험한 게임을 방치한 것이다.

OECD 가입작업이 한창 무르익던 95년말부터 재정경제원에서 금융파트를 담당했던 인사의 회고. 『OECD 가입이 확정되기 전까지 금융과 자본시장에 대한 이렇다할 개방조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 각부문이 OECD 환상에 사로잡히면서 규제는 악이고 자율은 최선이라는 식의 논리가 판을 쳤습니다. 96년 8월에 2차로 이루어진 종금사 무더기 인허가도 OECD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무리한 외화차입 등에 대한 건전성 감독은 뒷전으로 밀렸지요』

불길한 예감속에 96년 7월 우리나라가 OECD 가입의 최종 관문인 자본이동 및 국제투자위원회 심사를 통과하면서 OECD 가입이 사실상 확정됐다.

그로부터 3개월여 후. 재경원에는 뜻밖의 비보가 날아든다. OECD 가입과정에서 금융부문을 총괄했던 당시 금정연(琴正淵) 금융협력과장이 위암말기라는 선고를 받고 병석에 드러눕는다. 그는 이듬해 4월 끝내 숨졌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의 증언. 『OECD 가입작업이 본격화한 95년 1월부터 가입때까지 하루도 쉬지를 못했지요. 금국장(숨진후 부이사관으로 승진)은 실무책임자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부담이 컸습니다. 그가 숨진후 재경원에는 OECD가 똑똑한 사람만 잡았다는 한탄의 소리가 자주 들리곤 했지요』

그의 죽음은 환란을 예고한 불길한 징조였을까. OECD 가입작전을 시작한 지 3년여만인 96년 9월 OECD가입이 확정돼 우리나라도 외형상으로는 선진국반열에 올라섰으나, OECD 가입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멕시코의 전철을 밟게 됐다. OECD는 우리 경제에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OECD 가입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주요국들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 세계 정치 경제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활용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가짜 선진국으로서의 의무만 커지고 혜택은 거의없는 밑지는 장사를 해온 건 사실입니다. IMF 관리체제 이후 이나라가 OECD로 부터 지원받은 것이 거의 없는 사실에서도 이점은 분명합니다』 OECD공관에 근무했던 경제부처 인사의 고백이다. 그는 『왜 OECD에 서둘러 가입했는지 부터 따지는 것이 환란의 근본원인을 캘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동영 기자>

◎OECD 가입 3대 불가론/투기자본에 금융시장 교란/개도국 혜택없어 수출 악화/과소비 등 사회분위기 해이

「OECD 가입은 환란의 예고편이었나」 OECD 가입작업이 본격화한 문민정부 초기부터 제기된 「3대 불가론」이 현실화해 우리 경제는 결국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고, 회생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선 당시 대다수 경제전문가들과 정치권에서는 OECD에 가입할 경우 국내 금융·자본시장이 활짝 열리면서 국제 투기자본이 잇따라 출몰해 국내금융시장은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 투기자본의 유입은 환율과 금리를 급격하게 변동시켜 국내경제가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도 끊이지 않았다.

또 OECD 가입은 개도국임을 부인하고 선진국임을 자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특혜관세(GSP) 등의 혜택을 더 이상 받지못하게 돼 수출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이 전망은 그대로 들어맞아 해가 갈수록 무역적자가 쌓여 갔다.

정부가 OECD 가입을 공식 추진할 경우 국민들에게 선진국 환상을 심어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부추기고, 사회분위기를 느슨하게 할 것이라는 걱정의 소리도 높았다.

이같은 3대 불가론은 불행하게도 하나 둘씩 현실로 나타났다. 금융시스템 붕괴에 따른 국제신인도 하락과 외환위기, 눈덩이처럼 불어난 무역적자, 끝이 안 보이는 과소비행태 등이 우리 경제를 엄습해 결국은 94년 OECD에 가입한 이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멕시코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OECD는 어떤 기구/정책 등 협의 선진국 ‘사교클럽’

선진국들이 경제정책을 비롯한 상호관심사를 협의하는 사교클럽 정도로 볼 수 있다. 61년 9월 창설됐으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고 29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OECD는 각국의 현안을 놓고 협상을 벌이지는 않는다. 각종 정책을 토의하고 협조·조정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필요할 경우에는 회원국의 구조조정, 기업재무구조 개선, 경제발전방안 등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OECD에 가입할 경우 실제적인 경제수준과는 관계없이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개도국이 OECD에 가입하려면 시장개방 등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며, 가입후에도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지 않는 한 OECD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로 구성된 OECD내의 「WP(Working Party) 3」가 의사결정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멕시코(94년) 체코(95년) 헝가리(96년) 등이 가입했으며, 우리나라는 29번째 회원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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