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정당의 수명(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정당의 수명(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2)

입력
1998.07.27 00:00
0 0

◎‘1人 정당’ 권력 부침따라 ‘단명’/3공화국 모태 민주공화당 17년5개월 최장수기록/국민회의 탄생 3년 안팎 한나라당은 8개월 남짓「선거나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기 위해 조직된 집단」. 93년도판 한국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에 수록돼 있는 정당의 정의이다. 우리나라 정당들만큼 이 구절에 「충실한」 경우도 드문 것 같다. 대부분의 정당, 특히 여당이 특정권력과 생사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권력의 획득 또는 유지를 위해 정당을 만들었고, 정당은 그 권력유지를 최대의 「과업」으로 받들었다가 권력지주가 사라지면 같이 퇴장했다. 정당의 존립기간이 짧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국회사무처가 최근 펴낸 「국회 개원 50년사」를 보면 정부수립후 50년이 지났지만 최장수 정당의 수명은 불과 17년5개월. 63년 5월10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3공화국 출범과 함께 탄생한 민주공화당의 기록이다.

민주공화당은 80년 10월27일 8차 개헌과 함께 수명을 다했다. 그 다음 장수기록은 1공화국때의 조선민주당(16년), 한국독립당(〃)이 잇고 있다.

현재 국회의석을 가진 주요 여야 정당들의 나이를 보자. 공동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95년 8월11일생)는 채 3년이 못되고, 자유민주연합(95년 4월3일생)도 3년3개월에 불과하다. 더구나 거대야당인 한나라당(97년 11월24일생)은 8달을 겨우 넘겼고, 국민신당(97년 11월10일생)도 한나라당과 엇비슷하다.

특히 역대 여당은 권력자의 진퇴에따라 운명이 갈렸다. 자유당은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민주공화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정의당을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으로 갈아 치웠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꿔 놓았다. 신한국당은 이제 한나라당이 돼 있다.

정치선진국에는 「장수정당」들이 즐비하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은 1828년에, 공화당은 1854년에 각각 출범해 국가경영의 양대축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의회정치의 어머니격인 영국에선 1870년에 중앙본부가 설립된 보수당과 1906년에 공식탄생한 노동당이 선진 정당정치의 대명사처럼 이어져왔다. 일본만 해도 집권당인 자민당은 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해 43년의 전통을 잇고 있다.

건국 50년을 맞은 지금 우리 정당이 장수하기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서울대 안청시(安淸市·정치학) 교수는 『특정보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1인정당의 틀을 벗어나 사회세력과 계층의 이해관게를 잘 반영하는 제도화의 과정을 밟는 것』을 제시했다.

안교수는 『정당이 개인 또는 특정 정치세력과 관련을 가지되 독자적인 제도아래 자율성을 갖고 움직일 수 있어야 오랜 기간 존립할 수 있다』면서 『이를 위해 정당의 정강 정책도 오랜 기간 안정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 현역 중진정치인도 『우리 정당의 중심은 이제 인물이 아니라 정책, 노선이 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정당과 사회 이익단체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신효섭 기자>

◎정당이름 변천사/역대 70여개중 ⅓이 ‘민주’ 용어사용/‘국민’‘통일’도 빈번등장/‘자유’는 의외로 5개 미만/‘회의’는 국민회의가 처음

반세기가 넘는 정당사에서 부침을 거듭해 온 크고 작은 정당의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민주(民主)」다.

우리의 정치를 주도해 온 주요 정당을 70여개로 간추렸을 때 이름중에 민주가 들어간 정당은 비공식 집계로 대략 3분의 1에 이른다. 40년대의 한국민주당, 50년대의 민주당이 여기에 포함된다. 60년대 5·16 군사쿠데타이후에도 다시 민주당이 등장했고 70년대엔 민주통일당이 있었다.

80년대엔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등이 각축을 벌이는 「민주 전성시대」를 맞는다. 90년대엔 통합민주당 자유민주연합등이 맥을 이었다.

민주 다음으로 빈번히 등장한 단어는 「국민」과 「통일」이다. 70여개 주요 정당중 7∼8개의 정당이 이 단어들을 이름에 사용했다. 50년대를 풍미했던 자유당을 비롯, 90년대의 자유민주연합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이름에 올린 정당은 5개 미만으로 의외로 적다.

정당이름의 다양성만을 놓고 보면 좌·우익이 혼재했던 해방직후는 가히 「이름 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민주동맹 일민구락부 국민회 대성회 대동청년단 단민당 한국독립당 건국준비위원회 근로인민당등이 모두 이 시대에 명멸했다.

제헌국회에 단 한명의 여성의원을 배출한 대한여자국민당도 있었다. 좌익계 정당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는 데 49년 10월 좌익정당이 불법화된 이후 「인민」도 우리 정당사에서 사라졌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은 약칭으로 민주를 생략하고 「공화당」으로 불려서인지 독재의 길로 빠졌다.

「평화」를 당명에 포함시킨 정당으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창당한 평화민주당이 거의 유일. 김대통령은 약칭인 「평민(平民)」당에 더욱 애착을 느꼈다는데 정작 13대 대선에선 당시 민정당의 노태우(盧泰愚) 후보가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하는 바람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일화도 있다.

당명에 「회의」를 도입한 것은 현재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처음인데 95년 창당 당시 공모로 결정했다.<고태성 기자>

◎국회의 은어/영감=국회의원/실탄=선거·지역구관리자금/오리발=눈먼돈·비자금

『영감, 오리발갖고 퇴청하신다. 실탄은 따로 내려보낸다더라』

무슨 암호같기도 하고 장난말투 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비자금을 가진 국회의원이 의원회관을 나서고 있고, 지원자금은 다른 방법으로 건네겠다는 뜻을 측근들이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제헌국회이후 50년동안 우리나라 정가(政街)에서는 변하지 않고 전래되는 호칭과 은어들이 있다.

먼저 모든 의원들은 측근과 제3자와의 대화에서 「영감」이라고 통칭된다. 심지어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의원 등 여성 의원들에게도 「영감」이란 호칭이 사용된다. 비서진들이 『우리 영감이…』라고 얘기를 꺼냈다가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운운하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손동작으로 의원을 가리킬때는 한 집단의 장(長)에게만 쓰이는 것처럼 엄지손가락 하나를 세운다. 의원회관 건물에는 299개의 엄지손가락들이 앉아 있는 셈이다.

또 의정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인 자금에는 여러 용어가 사용된다. 이른바 「눈먼 돈」은 「오리발」. 사실상 불로소득이기에 출처나 사용처를 묻지말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하지만 선거전이나 지역구 관리 등 에 쓰이는 돈은 「실탄」「총알」등이다. 전장(戰場)에서 가장 요긴히 쓰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국회본관은 「본청」이다. 그래서 의원이 본관이나 의원회관 어디를 나서든지 무조건 「퇴청」이다.<염영남 기자>

◎정치자금 역사/‘계보=돈정치’ 고비용 사슬/여당은 정경유착 통해 천문학적 비자금/야당은 공천뒷거래·전국구로 목돈 챙겨

정치는 사람과 돈이다. 사람도 결국은 돈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자유당 정권시절부터 정치와 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국민소득의 개념조차 희미했던 당시에도 여당은 정경유착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밀 수입 관련 특혜로 말썽을 빚었던 「삼분폭리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야당은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하도 여당측의 감시가 심해 신문지 등에 돈을 싸서 전달했다. 『독립군 자금 건네주듯 했다』는 「전설」은 빈말이 아니었다.

4·19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하도 단명해서 정치자금이고 뭐고 없었다. 게다가 각종선거에서 민주당 막대기만 꽂아도 됐기 때문에 딱히 큰돈이 필요한 정치구조도 아니었다. 정치자금이란 용어가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은 5·16이후였다. 증권조작·새나라자동차·워커힐·빠찡꼬 파동 등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둘러싼 이른바 4대 의혹은 정치자금 조달관련 사건이었다.

공화당 사전조직과 창당에 들어간 「실탄」이 이곳에서 나왔다. 김부장의 이른바 제1차 「자의반타의반」 외유는 그 여파였다.

이후 집권 공화당의 정치자금 조달창구는 협의체 형식으로 운영됐다. 중앙당 재정위원장, 대통령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주멤버였다. 수입과 지출내역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보됐다. 외자도입과 관급공사 커미션이 주 수입원이었다.

협의체 구성원들이 자주 알력을 빚자, 박대통령은 유신이후 정치자금을 직접 관리했다. 이 「전통」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천문학적 액수의 전·노비자금 사건이 웅변하듯 5공이후 여당은 최소한 돈걱정은 하지 않았다. 재벌과 정권이 특혜와 비자금을 통해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의 「큰손」은 지금도 정치권에선 「향수어린」 회자(膾炙) 소재가 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야당은 어땠을까. 평상자금은 돈있는 「정치지망생」들로부터 90%이상을 조달했다는 게 정설이다. 선거때가 되면 전국구를 팔아서 뭉칫돈을 마련했다. 당선이 보장되는 지역은 공천과정에서 돈거래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때면 기업 등으로부터 「보험금」 성격의 목돈을 챙길 수 있었다.

한국정치의 오랜 관행인 계보정치는 「돈질」 정치에 다름아니었다. 선거 때면 1,000만∼5,000만원, 추석·연말연시·여름휴가 때면 500만원, 저녁한번 먹고나면 100만원 하는 식이었다. 고비용 정치구조는 이같은 생존사슬에 의해 형성됐다.<홍희곤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