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경영 책임’ 쐐기… 금융 관행 변혁 예고/퇴출은행·기업 주주들 소송사태 가능성제일은행 주주대표소송 판결은 금융관행과 경제운영의 기본틀을 바꿀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먼저 사문화한 소액주주들의 권리가 부활했다. 지금까지 그룹회장들은 10% 미만의 주식지분으로 그룹전체의 경영권을 마음대로 행사한 반면 대다수 소액주주들은 철저하게 소외당해 왔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소액주주의 권리행사가 강화돼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됐다.
불법행위로 인한 회사의 손실에 대해 경영진에게 엄정한 배상책임을 물어 개인재산으로 배상토록 한 대목은 금융관행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전망이다. 경영진은 이제 사후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이에따라 관치금융의 폐해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나 정치권의 압력 또는 상부의 지시에 굴복, 불법대출을 결재하면 나중에 자신의 집이 경매에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은 또 최근 재계에서 일고 있는 부실 기업주와 경영진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의 위법성 논란에 대해서도 쇄기를 박는 계기가 됐다.
유사 소송도 잇따를 전망이다. 5개 퇴출은행의 소액주주는 모두 82만8,000여명으로 7,400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미 동화은행 소액주주 등이 주주대표소송을 내기위해 준비하고 있다. 퇴출기업중 10개 상장사의 소액주주 6,600명과 기아그룹 등의 부도 대기업 소액주주들이 구경영주를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1주만 있어도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단독주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에선 이미 주주대표소송이 일반화해있다. 미국에선 경영진의 25%가 주주대표소송을 당했으며 일본에선 연간 200∼300건의 주주대표소송이 제기되고 있다.<박일근 기자>박일근>
◎금융권 반응/“관치금융 철폐에 새 전기”/“청탁 물리칠 확실한 명분 생겨”/경색된 대출 더 위축될까 우려도
이번 소액주주 승소판결에 대해 금융권은 오랜 숙제였던 「관치금융철폐」「은행장전횡방지」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란 점에선 실(失)보다는 득(得)이 많을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으며 일찌감치 이런 장치가 있었다면 부실대출이 금융, 나아가 경제전체를 부실화시켜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가는 것을 막았을수도 있다는 아쉬움까지 표시했다.
한 시중은행임원은 『엄밀히 말해 부실대출은 관치금융과 이에 영합한 은행경영진의 공동책임』이라며 『이번 판결은 한보사건처럼 은행 경영진에게 가해지는 정치권이나 정부로부터의 각종 외압, 청탁을 물리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은행임원은 『앞으론 투명하지 않은 대출은 아예 꿈도 꾸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부정적 파급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은행간부는 『무조건 은행경영진의 책임만 묻는다면 보신주의를 불러일으켜 가뜩이나 경색된 기업대출을 더욱 위축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막대한 부실을 떠안고 있는 은행들로선 이번 판결로 유사한 소액주주들의 소송이 봇물처럼 쏟아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한편 400억원 배상판결을 받은 이철수(李喆洙) 행장 등 전제일은행 경영진 4명은 그만한 재산이 없는 상태여서 남은 재산전부와 함께 앞으로 10년간 모든 소득을 압류당하게 된다.<이성철 기자>이성철>
◎재계 반응/경영 위축 우려 대책 부심/“투명경영 정착 기여” 평가속/소송 도화선되지 않을까 긴장
재계는 24일 제일은행 소액주주들의 승소에 대해 『투명경영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소액주주들의 소송이 봇물터지는 도화선이 되지 않을 까 긴장하고 있다.
특히 참여연대가 5대 그룹을 대상으로 주주대표소송을 내기로 한데 대해 『경영투명성 제고를 위한 사회운동 차원에서 바람직하지만 본격적인 소송러시로 이어질 경우 기업경영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삼성은 참여연대가 다음달 삼성전자에 대해 회계장부 열람권 소송과 함께 이건희(李健熙) 회장 등 이사진을 상대로 한 주주대표 소송을 내기로 한 것에 대해 『무슨 소송을 제기할 지 알 수 없어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긴장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도 『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홍역을 치르는 상황에서 주주대표 소송이 터져나올 경우 최고경영자의 경영의욕이 위축될 것』이라며 『소액주주권 강화방안은 시기와 강도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도 『경영의 불안정성이 높아질 수 있다』며 기업경영위축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경련 손병두(孫炳斗) 부회장은 『의도적인 회사재산 빼돌리기와 같은 행위를 넘어선 통상적인 경영실패까지 배상하게 된다면 경영자들의 복지부동 현상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이의춘 기자>이의춘>
◎소송 주역들/참여연대·소액주주 61명 승리/배상금은 은행으로 귀속/실익없어도 끝까지 참여
제일은행 소액주주들의 주주대표소송 승소판결이 나오기까지에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의 공이 컸다. 참여연대의 장하성(張夏成) 고려대 교수는 소송을 위해 소액주주 모집광고를 신문에 냈다. 또 주주총회 참가운동을 병행하며 총회꾼을 고발하고 주주총회 결의취소 소송 등도 제기했다. 두달만에 제일은행 총발행주식의 0.5%인 82만주를 확보한 참여연대는 소송을 제기 1년만에 예상밖의 성과를 거뒀다.
주주대표소송이 가능했던 것은 소액주주들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이 있었기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은 주가하락과 감자로 인한 막대한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소송에 참여했다. 주주대표소송의 손해배상금은 회사로 귀속되기 때문에 소송에서 이겨봤자 주주개인에게 돌아가는 실익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참여연대 김기식(金起式) 사무국장 『이번판결은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소송에 참여해준 61명 소액주주의 승리』라고 말했다.
소송을 실질적으로 준비한 시민종합법률사무소 김석연(金石淵) 변호사는 『이철수 전 행장과 신광식 전 행장이 이미 법원에서 각각 10억원과 4억원씩의 추징판결을 받아 재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판결로 가집행이 가능해진 만큼 4명의 재산 상황을 끝까지 추적해 최대한 집행할 것』이라며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광범위한 법률검토를 하고있다』고 말했다.<박일근 기자>박일근>
◎판결문 요지
은행경영자는 대출여부를 결정할 때 회수불능의 위험이 없는지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만약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위험이 우려되면 대출하지 말고 대출하더라도 확실한 담보를 취득해 은행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피고들은 한보철강에 대한 대출금의 회수불능 위험을 충분히 예측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과의 유착관계에 기인, 담보없이 거액의 여신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도록 부하직원에게 지시했다. 이런 행위는 은행 최고경영자로서의 임무를 저버린 것이다.
한보철강에 대한 여신으로 발생한 손해가 미수이자를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2,713억원에 이르므로 원고들이 피고들에게 구한 400억원을 제일은행에 지급할 의무가 있다.
◎임원배상책임보험/“주주소송 배상 대비하시죠”
「주주소송이 두렵나요. 보험으로 대비하시죠」
IMF시대는 이철수(李喆洙) 전 제일은행장처럼 경영부실의 책임이 있는 임원의 경우 퇴임후라도 사재를 털어 손해를 보상해야 하는 「임원 수난시대」.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란 말처럼 보험회사들이 대기업이나 금융기관 임원들의 이같은 고민을 덜어줄 「임원배상책임보험」을 팔고 있다. 「임원배상책임보험」이란 말 그대로 회사임원이 잘못을 저질러 회사에 손실이 발생, 손해를 본 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했을 경우 임원이 물어내야 할 손해배상금과 소송비용을 보험회사가 대신 내주는 보험.
「임원배상책임보험」은 91년 국내에 도입된뒤 지난해까지만해도 가입실적이 전무했으나 IMF시대이후 재벌그룹 계열사 등이 잇따라 가입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전자가 3월 삼성화재를 통해 보험(보상한도 200억원, 보험료 26억원)에 가입한데 이어 삼성물산(150억원 규모), 삼성엔지니어링, 제일모직, 삼성전관, 삼성전기, 삼성항공 등도 잇따라 계약을 체결했다. 이밖에도 (주)쌍용과 쌍용양회 등 쌍용그룹 계열사와 동양, 동부, 제일화재 등도 임원들을 위해 보험에 가입했다.<조철환 기자>조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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