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반도체산업이 꽃을 피우던 94년 실리콘밸리에서 인텔사의 앤디 그로브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장차 반도체시장에서 삼성전자의 경쟁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삼성전자는 경쟁력있는 회사다. 기술도 그렇지만 자금력이 막강하다. 돈이 모자라면 삼성재벌이 도와줄 것이고, 그래도 위태로우면 한국정부가 나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우리 인텔은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가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경쟁자들 뿐이다』■요즘 한국 재벌기업들이 겪는 구조조정의 고통을 보면서 새삼 그로브회장의 말이 의미심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문어발식 미투(metoo)경영을 하는 한국재벌과 달리 그로브회장은 마이크로칩에 자신과 회사의 운명을 걸었다. 인텔은 설립된지 30년만에 연간 매출액 250억달러, 순익 70억달러, 시장가격(주가×총주식수) 1,200억달러의 세계 10위 기업이 됐다. 우리 재벌이 비계덩어리 거인이라면 인텔은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 몸을 가졌다.
■은퇴를 앞둔 그로브 회장은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는 책을 냈다. 거기에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으로 표현되는 그의 비범한 직관이 담겨있다. 기업환경의 본질적인 변화로 종전에 잘 통하던 「룰」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최고경영자의 판단과 새로운 대응전략에 따라 그 기업은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흥미있는 것은 최고경영자가 기업내에서 변곡점의 징후를 제일 늦게 아는 사람이라는 그의 지적이다.
■이제 많은 우리나라 기업들에 「전략적변곡점」이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닐까. 옛날에 잘 먹히던 「룰」이 안 통하고 있다. 정경유착과 내부자거래등 기업관행, 고객의 취향, 세계경쟁등 「펀더멘털」이 변해가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경영자들이 전략적 변곡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에 대응하는 능력은 과연 몇 점일까. 궁금하고 걱정스럽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