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 페테르부르크 외신=종합】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적군에게 학살된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과 신하 등 11명의 유해가 사망 80년만인 17일 제정 당시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부 차원의 안장식을 거쳐 로마노프 왕가 묘역에 안장됐다.안장식은 이날 정오 19발의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베드로·바울성당 인근의 성캐더린 예배당에서 안장미사 형식으로 치러졌다. 통상적인 21발의 예포를 쏘지 않은 것은 그가 재위중 축출됐기 때문이다.
안장식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 50개국 외교사절과 영국 켄트공인 마이클공작 등 로마노프 왕가 후손 및 친족 50여명이 참석했다. 옐친 대통령은 당초 안장식에 불참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 필요가 있다』며 참석했다.
그는 조사를 통해 『우리는 엄청난 범죄에 오랫동안 침묵해왔다』며 『니콜라이 2세의 안장식을 계기로 피로 얼룩진 20세기를 마감하자』고 말했다.
안장식은 정교회와 공산당의 반대 등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해 소박하게 진행됐으나 성당 주변에는 수천명의 러시아 시민이 몰려들었으며, 현지 TV 방송사들은 니콜라이 2세에 관한 특집방송을 방영하고 유해 이송을 생방송하는 등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또 공식대표단을 파견치 않기로 한 국가 두마(하원)의 결정에도 불구,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야블로코당 당수와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자유민주당 당수 등은 두마에서 별도의 추모식을 갖기로 했다.
◎니콜라이 2세는 누구/러 혁명기 무능 대처/1918년 50세로 생애 마감
알렉산드르 3세의 맏아들로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재위 1894∼1917). 우유부단하고 무능하면서도, 완고한 전제 군주였다.
1905년 러·일 전쟁 패배, 「피의 일요일(평화시위대 발포사건)」, 1914년 1차 세계대전 등 제정 말기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국가두마(의회)를 해산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황후 알렉산드라와 점술사 라스푸친에 둘러싸여 정치를 등한시했다.
1917년 2월 부르주아 혁명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에 의해 폐위돼 서시베리아에 감금됐다. 그해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볼셰비키들은 백군(반혁명군)이 진격해오자 1918년 7월17일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그를 처형, 폐광에 버렸다. 당시 50세였다.<박진용 기자>박진용>
◎황제 一家 피살순간/赤軍 “사진찍자” 속여 지하실서 총격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의 안장식이 거행된 17일은 80년전 황제 일가족이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의 집」에서 적군들에게 학살된 날이다. 학살 정황과 관련해 여러 설(說)이 있으나 당시 현장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의 저자 로버트 K. 매시의 기록이 대체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7일 자정이 막 지나자 적군들은 황제 일가를 모두 깨워 지하실로 내려보냈다. 조만간 은거지 이동에 대비해 황제 일가의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니콜라이 2세가 혈우병 때문에 움직임이 불편했던 13세된 황태자 알렉시스를 안고 앞섰고 알렉산드라 황후가 뒤를 따랐다. 이어 황녀들과 황실 전속의사, 시종 등이 마지막으로 내려갔다.
적군들은 황제 일가족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의자가 두 개 있었다. 황후와 몸이 불편한 황태자가 의자에 앉고 나머지 가족이 뒤에 두줄로 나란히 섰다.
현장의 적군책임자 야코프 유로프스키(89년 사망)가 『됐어』라고 혼잣말을 하는 듯하더니 느닷없이 바깥을 향해 큰 소리로 신호하자 리볼버 권총을 들고 숨어있던 11명의 병사들이 닥쳐 미리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신분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개머리판으로 시신을 훼손했다.
시신들은 트럭에 실려 인근 숲으로 옮겨졌다. 적군들은 황녀들의 시신을 능욕한 후 폐광에 던져버렸다. 크레믈린에 앉아있던 레닌이 「작전 종료」를 보고받은 것은 그 직후였다.<장인철 기자>장인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