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없는 제헌절을 맞는 오늘의 심정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국호를 정하고 건국이념과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제헌 50주년을 기리는 오늘, 정작 국회는 원구성조차 못한 상태다. 헌정 50년의 무게와 의미를 이처럼 무색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국회 자신이지만, 우리 모두가 제헌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자괴하지 않을 수 없다.더구나 지금 우리는 생존의 갈림길에 선 국난의 시대를 맞고 있다. 건국이래 전쟁과 민주항쟁 등 숱한 고난과 희생을 치르고 땀흘려 일하며 달려온 50년 세월의 결과가 미증유의 경제난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처참하고 부끄러운 심정이다. 그동안 헌법은 9차례나 개정되면서 영욕의 역사를 기록했고 국민은 초대 헌법 정신의 원상회복을 위해 투쟁해왔다고 할 수 있다. 두달이 되도록 국회를 팽개쳐 온 여야정치권은 헌정사에 다시 뼈아픈 오점을 남기고 있다. 제헌국회를 향해 15대 국회는 머리숙여 사죄해야 한다.
국회부재로 인해 당장 절실한 문제들이 방치되고 있다.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이나 외자유치 등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시대적 과제지만 국회는 이를 처리해 주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도 국회공전으로 인해 민생현안들이 외면당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지만 작금의 국회부재는 국가생존의 현안들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죄질」이 다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국회를 열지 못한다면 우리 정치권의 총체적 무능과 준법 불감증을 엄하게 꾸짖을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은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법치국가에서 준법은 법이전에 사회의 기초규범이다. 법과 규범은 상위지도층이 앞장서서 준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정치권은 국회법을 무시하고도 안색하나 변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당파집단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야당측은 여당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조복(弔服)차림으로 제헌절 행사장에 나간다지만, 여야 모두를 탓하는 국민의 시선을 헤아리지 못하는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국회 원구성이 안되는 것은 국회의장직을 둘러싼 다툼 때문이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결국은 여소야대 구조가 빚는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됐다고 할 것이다. 여측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계개편을 다각도로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이 과정에서 국회의 파행상이 깊어갔다. 나름의 처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배경이 어찌됐든 정국을 책임지고 주도하는 것은 여당의 몫이다. 이미 제시된 자유투표에 의한 의장선출 방안을 깊이 검토할 것을 다시 주문한다. 그래서 야당을 추스르고 불법적 국회부재상태를 하루속히 해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기의 비상시국에 정치권이 비전을 주지는 못할 망정 고통스러운 국민들에게 좌절과 분노를 더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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