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는 「비자금」이라는 복마전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박정희 유신정권때인 76년부터 전두환정권때인 85년까지 10년동안 「한국에서 해외로 빼돌린 외화가 120억 달러」라는 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다. 12년전 미국의 금융재벌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가 내놓은 「제3세계의 자본도피」조사보고서에 들어있는 한 대목이었다.「해외로 빼돌린 120억달러」는 대체로 당시 한국이 지고있던 외채더미의 26%선이다. 다시 말해서 외채의 4분의1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다시 10여년이 흐른 지금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등장했다. 김영삼정부시대에 채 5년도 못된 4년9개월동안에 어떻게 해서 빚더미가 3.7배 규모로 폭발했는가하는 수수께끼다. 김영삼정부는 노태우정권으로부터 430억달러의 외채를 인계받고, 임기말 직전인 작년11월말에는 1,569억달러로 수직상승시켜 놨다.
만일 76년부터 10년동안처럼 외채의 26%가 빠져나갔다면, 김영삼정부의 빚더미중 408억달러가 빠져나갔다는 계산이 된다. 「세계화」라는 구호밑에 외환관리의 빗장을 와장창 풀어버렸던 김영삼정부시절에는 「26%」만 빠져나갔을까 하는 의문이 물론 제기될 수 있다.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추측이 크게 틀린 게 아닐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하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검찰에 의하면 한보비리의 주인공인 정태수 총회장의 넷째 아들이 작년11월 3,200만달러(460억원)를 빼돌려 스위스은행에 쥐도새도 모르게 감춰놨다. 김태정 검찰총장의 말로는 이처럼 『돈을 해외로 빼돌린 사람들을 파악하고 있고, 그 액수가 너무 엄청나 국민이 알 경우 난리가 날 정도』라고 했다. 아마도 빼돌린 돈은 「총외채의 26%」, 다시 말해서 408억달러를 훨씬 웃도는 선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 나라의 기업, 특히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비자금」을 관리해왔을 것이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처럼 빼돌린 돈, 탈세한 돈, 땅투기로 떨어진 돈벼락은 「그림같은 별장」이나, 상수원 보호구역안의 러브호텔이나 위락시설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또 돈이 있고 탈법과 비리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관권의 부정부패가 있게 마련이다. 부도를 낸 한 하청건설업체가 원청업체에 사례금 2억원, 담당 공무원에 5,200만원의 뇌물을 뜯겼다고 공개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정부가 조사·수사기관들을 총동원해서 벌이고 있다는 소위 「총체적 사정(司正)」에서 이런 저런 사연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야말로 상식과 양식이 실종하고, 돈과 권세만이 지배해온 「졸부공화국」의 실상이다.
14일부터 구조조정을 둘러싼 파업이 시작돼 세상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불법은 안된다』는 정부, 그리고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대기업들이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양대 노총과 맞서 있다.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두대의 기관차가 마주보고 달리는 꼴이다.
하지만 수습을 위한 탈출구는 분명히 있다. 그 열쇠는 「고통분담」이다. 구체적으로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포기하면 된다. 돈 빼돌리거나, 불법 별장이나, 탈세나, 부정부패나 주저없이 세상이 깜짝 놀랄만큼 법과 원칙대로 엄격하게 처리해야 한다.
경영에 실패하고, 나라경제를 파탄으로 끌고 온 복마전의 경영주들, 특히 한국에만 존재하는 소위 「오너」들은 자진해서 「퇴출」하는 게 좋다. 그것만이 노조나 국민에게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고통분담의 메시지다.
그것은 돈이 들지 않는 고통분담이자, 이 나라가 졸부공화국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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