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 농림 책상내려치자 美 “당신이 옳소”/93년 12월13일 제네바 ‘쌀숫자’ 줄다리기/시장접근치 1∼4%에 정부 “최고의 차선”/국회선 “쌀빗장 열어주다니 이 매국노…”『렛 잇 고(Let It Go)』
93년 12월13일 오전(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포럼호텔. 허신행(許信行) 농림수산부 장관은 책상을 내려치며 절규하듯 외쳤다. 그리고 건너편에 앉은 에스피 미국 농무장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에스피장관은 넋이 나간 표정이고 연일 밤샘협상에 수척해진 김광희(金光熙) 농수산부 차관보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허에스피 4차 회담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사무국의 최후통첩시간인 12월12일 자정을 10시간이나 넘긴 오전 10시부터 시작됐다. 최종담판이었다. 초읽기에 몰린 탓에 속전속결이 예상됐으나 회의장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유 메이 비 라이트(You May Be Right)』 에스피장관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예상밖의 답변이었다. 허장관이 던진,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초강수에 맞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수긍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GATT사무국에서 협상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오마라 차관보에게 건 것이다. 그리고 통보하듯 이렇게 말했다. 『한국을 특별대우할 수 밖에 없네』
「제2의 개국」이 확정된 것이다. 동시에 가장 늦게까지 벌어졌던 한미협상이 일괄타결됨에 따라 우르과이라운드(UR)가 7년의 산고 끝에 세계경제헌법으로 사실상 채택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에스피장관은 이날 한미 양측이 1차 허에스피회담에서 잠정합의한 쌀개방 조건을 번복하고, 한국측에 불리한 조건을 들고나왔다. 교수출신 흑인정치인인 그는 평소와 달리 단호하고 고압적인 태도였다. 일본이 한국의 쌀시장 개방조건이 좋아 일본정부의 입장이 어렵다고 미국과 GATT에 항의하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개방조건이 자신들(관세화유예 6년에 최소시장개방 4∼8%)보다 휠씬 좋다는 소식에 여론이 들끓자 10일로 예정됐던 개방발표를 연기, 하타(羽田孜) 외무장관을 제네바로 급파했다. 게다가 협상단은 3일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사과담화를 통해 쌀시장 개방을 발표하는 바람에 이미 쌀개방이란 루비콘 강을 건너 되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과의 협상이 결렬돼 UR협정서가 117개국 전원합의로 채택되지 못하는 「불상사」를 바라지 않았다.
『일본의 정치가 무너지면 어떻게 합니까. 뒷숫자 하나라도 양보(1∼5%를 뜻함)하십시요』(에스피) 『한국의 쌀 숫자 하나 가지고 일본처럼 큰 나라가 무너집니까. 무너진다면 무너지게 두세요(Let It Go)』(허) 『당신 말이 맞는 것같군요(You May Be Right)』(에스피)
한미 양국은 이날 관세화유예기간을 10년으로 하되,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최소시장 접근폭을 1∼4%로 확정했다. UR협상의 핵심인 관세화를 특별히 10년간 적용하지 않는 대신 UR발효 첫해인 95년부터 5년뒤인 99년까지 국내 쌀유통량의 1∼2%를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2∼4%로 끌어올리기로 한 것이다. 관세화는 해당품목의 국내외 가격 차이만큼을 관세로 매겨 수입가격을 국내가격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인데, 관세를 아예 없애는 무세화(無稅化)를 위한 전초작업이어서 한국과 일본 등이 강력하게 반대해 관세화 예외와 관세화 적용의 절충선인 유예조치를 받아냈다.
UR협상의 주된 쟁점은 쌀개방이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았을뿐 12월4일의 허에스피 1차 회담에서 개방은 물론 개방폭까지 잠정합의됐기 때문이었다.
노트위에 여러가지 수치와 그림을 그리면서 혼자 골몰히 생각을 하던 에스피장관이 연필을 내팽겨쳤다. 『전반 5년 동안에는 1∼2%, 후반 5년에는 3∼4%로 하면 당신의 장관자리가 안전하겠느냐』(에스피) 『글쎄, 본국과 상의해 보겠다』(허) 『나도 본국 정부와 업계 대표는 물론 유럽공동체와 케언즈그룹(농수축산물 수출국가), 그리고 일본 대표들과도 상의하겠다』(에스피)
이후 협상은 쌀개방 시기와 허에스피 1차회담 결과를 바탕으로 한 쇠고기 등 다른 농수축산물과의 연계협상에 쏠렸다. 금융 통상 등 다른 분야의 협상은 나름대로 진통은 있었지만 큰 줄기는 주요 선진국의 결정에 따르는 수준이었다.
변수라면 김대통령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회담(12월7일)이었다. 김대통령은 최소시장 접근치를 5년간 동결해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임기중에 쌀이 수입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박재윤(朴在潤) 청와대경제수석은 5년 동결을 관철하라고 협상팀에 강력히 지시했고 훈령도 하달됐다. 핵심협상실무자였던 천중인(千重仁) 농림수산부 농업협력통상관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훈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화회담 1시간뒤 제네바. 허장관은 미키 캔터 미국무역대표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 대통령이 당신 대통령에게 직통전화를 1시간전에 했는데 연락을 받았습니까』(허) 『받지 못했습니다』(캔터) 이날부터 미국 실무자들이 공산품과 서비스분야에 파상공세를 퍼부으며 개방압력의 수위를 급격하게 높였다. 또 농업 공산품 서비스 등 전분야의 고위실무자가 한자리에 모여 회담하는 한미 고위 실무자회담까지 제안했다. 혹을 떼려다 붙인 격이었다.
『늦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운이 없는지, 선생님들이 운이 없는지. 이미 훈령을 내렸습니다』 1차회담 다음날인 5일. 이경식(李經植) 경제부총리는 김성훈(金成勳) 쌀과 기초 농산물 수입개방 저지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현 농림부 장관)과 서경석(徐京錫)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같은날 오전에 항의차 면담한 황인성(黃寅性) 총리가 「고견」이라며 이부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리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이부총리는 하루전인 4일 기자간담회에서 쌀개방의 책임을 지겠다며 쌀개방을 시사했다. 허에스피 1차회담의 결과를 보고 받고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5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 출석한 이부총리는 제1 야당인 평민당의 김종완(金鍾完) 의원으로부터 『이 매국노. 쌀빗장을 열어줘. 이완용 같은 사람』이라는 「욕」을 듣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는 쌀개방은 곧 농촌을 말살하는 살농(殺農)이며 매국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면 「쌀 사수(死守)」를 외치던 정부가 왜 단 한차례 협상에서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꾸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1차 협상결과가 예상외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협상대표단이 가지고 간 훈령은 1안이 개방불가였지만, 실제 훈령이라고 할 수 있는 2안은 관세화유예 10년에 최소시장접근치 2∼4%였다. 따라서 협상결과 자체는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협상단은 『최선은 아니지만 최고의 차선』이라고 자평했다. 물론 협상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부총리는 『한국의 농업이 일본보다 사정이 어렵다는 것은 미국도 안다. 일본보다 좋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막판에 한국의 덜미를 잡았던 일본이 협상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에 큰 도움을 준 점이다. 허장관은 11월초와 말에 김차관보를 은밀하게 제네바와 일본으로 파견했다. 여기서 일본 농림수산부의 시와쿠심의관은 『미국이 농산물 수출국인 케언즈그룹을 설득하도록 유도하라』 『에스피는 합리적인 사람인만큼 장관끼리 협상하면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는 등 유용한 협상전략을 조언했다. 또 하나는 쌀빗장을 열었던 미국이 중국쌀에 밀려 아직까지 한국에 쌀을 한번도 수출하지 못한 점이다.<김경철 기자>김경철>
◎UR협상후 정국파동/野 “정부 재협상 회피”/김양배 농수산 해임/이회창은 YS와 충돌
UR협상은 여진(餘震)도 엄청났다. 재협상 파동으로 발전, UR협정서가 채택된지 5개월이 지난 94년 5월까지도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이 과정에서 김양배(金良培) 농수산부장관이 취임 100일도 못채운 채 하차했고,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이회창(李會昌) 총리가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문제의 발단은 허장관 후임으로 취임한 김장관이 94년 1월21일 국회에서 『지난해 12월15일 완전타결된 UR 협상안이 최종적인 것』이라면서 UR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밝힌 것. 당시 야당과 농민단체들은 쌀개방에 반대하며 재협상론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3월에 국가별 이행계획서를 GATT에 제출하면서 내용을 수정했다. 협정서와 달리 이행계획서는 사후 검증과정에서 조정이 가능했다. 더구나 검증과정에서 국영무역 및 수입부과금 대상품목을 117개 추가로 요구, 이중 97개를 관철시키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수정이 곧 재협상으로 해석돼 재협상을 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의도적으로 재협상을 피하고 있다는 것으로 비약됐다.
김장관은 4월1일 『수정내용을 미리 보고하지 못해 오해를 증폭시킨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으나 3일뒤인 4일 전격해임됐다. 이총리 역시 5일 『의혹을 불러 일으키게 한데 대해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당시 이총리는 『내각이 나를 속이고 결과적으로 국민을 속이게 된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 청와대가 총리사과문까지 작성해 내려보냈는데도 사과를 못하겠다고 버티다 결국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후 안보장관회의 문제로 김대통령과 충돌, 22일 사표를 냈다.
김대통령은 김장관을 95년 12월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재입각시켰다. 또한 이경식 경제부총리를 한국은행 총재에, 허신행 농림수산부 장관을 소비자보호원장으로 재기용했다. 국면돌파용 경질에 대한 일종의 사과의 표시였던 셈이다.
◎UR협상 최종합의안
·95년 1월까지 GATT를 대체할 다자간 무역기구(MTO)를 설립한다.
·95년 1월을 시점으로 공산품은 5년, 농산물은 6년에 걸쳐 관세를 철폐 또는 인하한다.
·원칙적으로 농산물에 대한 모든 비관세 조치를 일반 관세로 전환한다.쌀의 경우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특별대우」로 관세화를 일정기관 유예하되 그동안 일정량을 반드시 수입하도록 한다.
·최종 반덤핑관세의 회피를 막기 위해 반덤핑 조치를 적용한다.
·수출 자주규제 등 회색조치를 4년 이내에 단계적으로 철폐한다.
·통상 관련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특히 컴퓨터 프로그램 및 데이타베이스의 저작권과 대여권을 보호한다.
·국내 조달의 특별한 수준을 요구하거나 수출 상품의 수준과 관련해 수입을 양적 또는 금액상으로 제한하는 무역관련 투자조치를 금지한다.
·GATT 규정에 부합되지 않는 일방적 분쟁 조정 절차를 금지한다.
·원칙적으로 서비스에는 최혜국 및 내국민대우를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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