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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와 쌀파동:1(문민정부 5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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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와 쌀파동:1(문민정부 5년:41)

입력
1998.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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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 정상 ‘쌀개방 밀약설’ 민심 동요/93년 11월23일 클린턴 회담말미에 ‘쌀’ 언급/‘전적으로 협력’ 화답후 통역실수로 돌려/‘대통령직’ 건다던 공약 못지켜 결국 사과담화『국민에게 한 쌀시장 개방불가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데 대해 그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앞에서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93년 12월9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쌀시장을 열게 됐다며 사과담화를 발표했다. 김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지지도가 90%를 넘나들던 당시로서는 「뼈를 깎는」 특단의 민심수습책이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김대통령의 실언과 실수, 그리고 공직자들의 책임감없는 자세가 빚어낸 자업자득이었고 이후 문민정부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겁니까』 93년 11월26일 청와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의 시애틀 정상회의와 한미정상회담을 마친 김대통령이 「세계로, 미래로」란 새로운 슬로건을 던지며 귀국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박관용(朴寬用) 비서실장이 정종욱(鄭鍾旭) 외교안보수석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회담도중 「쌀」이란 말은 없었잖아요』 『사실은 클린턴대통령이 「라이스」(쌀)를 언급했습니다. 우리말로 통역하는 과정에서 빠진 겁니다』(정수석) 『아니, 뭐라구요』

김대통령은 APEC 정상회담을 마친뒤 11월23일 백악관을 방문,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북한 핵문제가 주된 관심사였으나 클린턴대통령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UR협상이 일주일 앞으로 임박했기 때문인지 회담 말미에 쌀과 농업개혁(개방과 보조금 삭감 등)에서 협력을 당부했고, 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전적으로 협력(Fully Support)하겠다』고 화답했다.

UR정국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야당은 정기국회중이던 국회에서, 농민단체들은 집회와 시위 등을 통해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미 쌀개방을 약속했다」고 강력하게 밀약설을 제기, 민심이 동요했다. 당시 쌀개방운동을 주도했던 현 정부 고위 관계자의 말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은 한미간 외교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통역의 실수로 돌린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정부는 쌀개방이 대세란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전적으로 협력」은 김대통령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한미 정상회담은 밀약설의 단초가 됐고, 이는 불이 붙기시작한 UR정국에 기름을 부어 문민정부를 코너로 몰아세웠다. 이 바람에 기대이상의 「성적」을 올린 UR협상 결과가 그만 빛을 잃었다.

여기에는 김대통령의 「원죄」가 작용했다. 『당선되면 대통령직을 걸고 쌀개방을 막겠습니다』 14대 대선유세가 한창이던 92년 11월21일. 당시 후보였던 김대통령은 농촌지역인 충북 제천에서 이렇게 공약했다. 10일쯤 뒤인 12월1일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한 패널리스트가 『직을 걸고 막겠다고 했는데 개방되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만큼 강조하는 뜻으로 말한거지 그걸 가지고 뭘…』이라며 슬그머니 넘어갔다.

당시 김대통령은 「직을 걸고」라는 수사(修辭)가 몰고올 「파문」을 직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후보들도 쌀 개방 반대를 거듭 강조했지만, 「직을 걸고」란 표현은 쌀개방시 하야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그래서 김대통령은 유세직후 「연설문을 잘못 써서 책임질 수 없는 공약을 하도록 만들었다」며 집필자를 「색출」하라고 측근들에게 호통을 쳤고, 이후 이 수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김영삼은 물러가라」 93년 12월7일 서울 여의도광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농민 3만여명이 이경식(李經植)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정부당국자들이 3일전 쌀개방을 시사한데 격분, 쌀개방 반대시위를 개최하면서 내걸었다. 주말인 12일에는 제2차 쌀수입 개방저지 범국민대회가 열린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정문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은 대도무문(大盜無門)이 되었다」는 제목의 대자보까지 붙었다.

쌀개방이 문민정부의 도덕성 시비로까지 「비화」된 데에는 정책당국자들의 무사안일도 한몫을 했다. UR협상이 미일간의 쌀개방 밀약으로 일본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조짐을 보였던 10월에도 「설마 내 임기중에 타결되랴」는 생각에 「쌀개방을 하지않는다」는 원론을 폈다면, 10월이후에는 「쌀개방이 불가피한데 큰일났다」고 속앓이를 하면서 쌀개방문제를 최대한 회피하려했다. 이러는 사이에 협상이 임박, 협상전략상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게 됐다. 이 바람에 국민, 특히 농민들은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2의 개국」이라는 UR과 쌀개방에 직면, 뒤통수를 맞은듯한 배신감과 개방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당시 최고위급 당국자의 회고. 『장관들끼리 사석에서 「협상(UR)이 타결되면 아무개장관이나 내가 나가야 할 팔자」라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시절부터 7년이나 끌어온 UR협상이 하필이면 내 임기 때 타결되려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당시 정부 관계자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김대통령의 「직을 걸고」란 표현을 누군가가 나서서 적절한 시기에 미리 「톤다운」을 시켜야했지만, 「쌀개방=매국」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이같은 정부의 자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훈령권을 쥔 공식창구인 대외경제위원회가 11월까지 UR협상과 관련한 회의를 단 차례도 개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UR협상대표단이 제네바로 떠나던 당일인 12월1일에야 부랴부랴 첫회의를 열어 대표단과 훈령을 확정했다.

대신 김대통령이 방미중이던 11월하순께부터 황인성(黃寅性) 총리 주재로 총리공관에서 비공개 범정부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쌀개방을 하지 않되(1안) 불가피할 경우 일정한 수준이상에서 타결한다(2안)는 훈령을 사실상 결정했다. 협상단이 제네바 도착후 개방으로 급선회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 외무부나 상공자원부 장관이 맡을 법한 협상단장을 농림수산장관이 맡은 것도 허신행(許信行) 장관의 자청과 다른 장관들의 기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경식 부총리의 증언. 『알만한 사람은 쌀개방이 불가피한 것을 다 알았지만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겉 다르고 속달랐던 셈이었죠』 계속된 그의 설명. 『10월중순께 일본이 미국에 쌀개방을 밀약했다는 소식을 워싱턴의 주미한국대사관으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방파제 역할을 하던 일본이 무너진만큼 파도가 곧 밀어닥칠 것은 자명했죠. 대통령에게 간단히 보고한뒤 허장관에게 정부의 대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내가 함께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허장관은 『이부총리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일본 농림부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이 미국과 합의했다는 사실을 농림부 자체 루트로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고 반박했다. 어쨌든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개방 자체보다는 자신의 임기중에 쌀이 수입되지 않도록하는데 집착했다. 12월7일 클린턴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 5년간 쌀수입 동결을 요청했으나 별 다른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최종협상이 끝나는 12일(실제 타결은 13일)로 예정됐던 사과담화를 9일로 앞당길 수 밖에 없었다.

12월16일. 김대통령은 황총리를 경질했다. 21일에는 이부총리 한승주(韓昇洲) 외무장관, 허장관까지 바꿨다. 박실장의 증언. 『개각을 하니까 다음날 아침신문 머릿기사에서 쌀기사가 사라졌습니다. 문민정부가 개각을 자주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죠』 이후 김대통령은 4번의 사과담화를 더 하게 된다. 개각을 활용한 국면돌파에 「맛」을 들인듯 이후에도 5번이나 경제부총리를 갈아치웠다. 그리고 4년뒤 김대통령은 실상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채 국가부도위기에 직면, 국제통화기금(IMF)행을 결정하게 된다. UR의 악몽이 IMF사태로 재연된 것이다.<김경철 기자>

◎UR협상 실무주역들/강봉균·선준영·임창렬·박운서·김광희씨 등 5명/대체로 승승장구

UR협상이후 기획원 외무부 농림수산부 등 주무부처 수장들은 퇴진의 고배를 든 반면 5개 부처 차관보들로 구성된 협상대표단 실무주역들은 대체로 승승장구했다.

강봉균(康奉均) 경제기획원 대외조정실장, 선준영(宣晙英) 외무부 차관보, 임창렬(林昌烈) 재무부 차관보, 박운서(朴雲緖) 상공자원부 차관보, 김광희(金光熙) 농림수산부 차관보 등이다.

서비스협상과 정부대표단의 대변인을 맡았던 강실장은 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거쳐 정보통신부장관에 올랐다. 또 현정부 출범이후에는 청와대 기획수석과 경제수석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지근에서 보좌하고 있다.

금융협상을 담당했던 임차관보는 조달청장을 거쳐 과기처 해양수산부 재정경제원 등 3개 부처 차관과 통산산업부 장관을 거쳐 경제부총리에 올랐다. 또 새정부에서는 국민회의 후보로 경기지사에 당선됐다.

공산품 협상을 맡았던 박차관보는 상공부 통상부 차관을 끝으로 관계를 떠나 한국중공업 임명직 사장과 공채 사장을 역임했으나 새정부 출범이후 중도하차했다.

핵심파트인 농산물 분야를 담당했던 김차관보는 농업진흥청장을 거쳐 정치인으로 변신해 신한국당 후보로 고향인 전남 신안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마사회 상임감사를 지내다 최근 퇴사했다. 선차관보는 주제네바대표부대사와 세계무역기구(WTO)서비스이시회 의장을 거쳐 초대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재직중이다.

◎UR와 쌀협상 일지

◆86년

·9월 우루과이 푼타 델 에스테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출범

◆90년

·12월 브뤼셀에서 UR 타결 실패

◆92년

·11월 김영삼 대통령 「직을 걸고 쌀개방 않겠다」고 대선유세

◆93년

·7월 도쿄 G7정상회담에서 연내타결 합의

·10월 일본 미국과 쌀개방 비공식 합의

·11월 황인성 총리 주재 비공개 대책회의

·12월1일 대외경제협력위 5개부처로 구성된 협상단 확정, 협상단 출발

·12월4일 1,2차 한미농림장관협상(제), 이경식 경제부총리 쌀개방 시사

·12월5일 3차 한미농림장관협상(제)

·12월7일 허신행 농림수산장관 미키 캔터 USTR 대표와 회담(제), 김영삼­클린턴 대통령 전화회담

·12월9일 김대통령 쌀시장 개방에 따른 사과 담화, 한미차관보급 전체회의(제)

·12월12일 김수환 추기경 나라를 위한 기도회, 11,12일 전국에서 쌀개방 반대시위

·12월13일 4차 한미농림장관협상(제)

·12월14일 일본 총리 쌀시장 개방 발표

·12월15일 UR 의정서 채택(제)

·12월21일 이경식 경제부총리 허장관 등 교체 황인성 총리는 17일 경질

◆94년

·4월 김양배 농림수산장관 재협상 파동으로 경질

·4월12일 모로코에서 UR 최종협정문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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