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북방정책으로 국제무대 위상 급속히 높아져/한미야전사령관 한국인 임명 등 양국관계 재정립 필요대두한국과 숱한 한국 친구들과 맺어온 지난 수십년을 돌이켜 보면, 81년 7월∼86년 10월의 주한 미국 대사직은 한국과 한·미관계의 가장 극적인 변화와 궤를 같이 했다는 것을 느낀다. 당시 학생들과 사회 운동가들은 『불법통치』라고 비난하며 반정부 시위를 계속했지만, 한국은 전세계로 부터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고, 또 국내의 삶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여러 지표를 통해 알수 있다. 임기가 한창 진행중이던 85년 5월3일 나는 뉴욕의 「한국학회」(Korea Society)로 부터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때 본국과 업무 협의차, 그리고 가족도 만날 겸 미국에 있었다. 한국의 역동적인 모습과 서(西)태평양에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좋은 기회였다.
「지난 15년동안 여러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컴퓨터를 통한 무역, 통신체계, 컨테이너 화물운송량 등에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나는 참석한 한·미 양국 청중에게 부탁했다. 이런 것들은 당시 태평양을 대서양보다 훨씬 좁게 만들었다. 연설의 주제는 한국이 세계의 「차세대강국」(Middle Power)으로 부상했고, 이는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었다. 향후 양국관계가 조화롭고, 또 응당 그래야 하겠지만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런 다양한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강조했다. 한국은 힘의 균형이 빠르게 이동하는 동북아와 환태평양지역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나는 세계무대에서의 한국의 역할에 엄청난 변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은 「차세대강국」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의사결정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또 서울이 세계무대에서 보다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 의견과 정책이 강대국간 회의에서 보다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국제관계에서 점증하는 한국의 유연성, 창의력, 그리고 창의적 접근방식을 요구했다.
주요 동맹국으로서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나는 미국인 청중에게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새로운 역할을 조정하는 일이 미국민에게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는 15년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한 국가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군사동맹 형식을 포함한) 여러 공공시설, 지적 임무를 수행하는 건축물, 심지어 전문용어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동아시아와 그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을 주요 우방국인 한국과의 긴밀한 협의없이 내렸던 때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한국민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사에 대한 그들의 다른 인식과 가치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10여년 전에 뉴욕연설에서 내가 표현했던 경고를 상기하면, 나는 그것이 오늘날에도 똑같은 비중을 갖고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을 이끄는 현 세대는 나이 어린 동생으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 대접받기를 원한다. 동생이란 개념은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미국이 사용하는 형제관계보다 종속의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계무대에서 주연으로 등장한 나라와 상의조차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재임기간중 언론계에는 서로 별 차이는 없었으나, 가끔 적잖게 정당성을 갖고 서울의 전제통치를 비판했다. 「대중성을 잃은 통치」「압제정권」「군부통치」는 표준말이 돼버렸다. 이는 가끔 평양의 이미지 조작자의 계략에 빠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들은 이 말을 반복하면서 거기에 욕지거리 수식어를 덧붙였다.
비판할 것은 분명히 많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압제행위 중간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이끌 튼튼한 토대를 인식해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항상 북(北)으로부터의 위협이 있었고, 김일성(金日成) 정권은 「위협이 현실」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줬다.
80년대 한국은 실생활에서 진정한 현대화를 경험했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이에 대한 추진력은 81년 「서울이 88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된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정권시절부터 시작된 여러 프로젝트들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정권이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정권이 이룬 업적도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80년∼81년은 인플레와 심각한 경제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는 재빨리 반전됐다. 80년대는 정치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부인들이 「한강의 기적」에 대해 쓰고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적 교양도 고양됐던 시기였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국회는 흥미있는 토론의 장이었다. 그리고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적 규정이 마련되고 있었다. 서울의 군수산업은 북측과 비교해 이미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10년동안 한국은 모든 면에서 땀을 흘리며 북한을 앞서가고 있었다. 보건 및 공공복지분야에는 한국전직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삶의 질」을 향한 거보(巨步)가 내디뎌졌다. 한국전쟁이라는 현대 한국역사의 비극적 사건은 더 이상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회고해 보면, 전두환씨가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퇴임한 것과 그의 동료장군인 노태우씨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개방된 선거를 통해 선출된 것은 지금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노태우 후보는 87년 격렬했던 항의시위의 심장부에 놓여있던 많은 요구사항을 수용, 그 해 6월29일 월요일 아침 중요한 약속을 발표했다. 이는 정치 현대화를 향한 커다란 진전을 의미했다. 노태우씨는 전임자가 시작했던 몇몇 정책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노태우씨의 「북방정책」으로 명명된 국제적인 개입정책이 포함돼 있다. 구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중국과의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 등이 진전을 이뤘다. 이 협상은 친구이자 외무차관을 지냈던 노재원(盧載源)씨에 의해 베이징(北京)에서 마무리됐다. 세계무대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한국의 새 역량에 대한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전대통령과 노대통령은 둘다 80년대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성장을 주도했는데, 청와대에서도 군 고위지휘관의 전통을 살리면서 때때로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장시간 성실히 근무하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전씨의 경우 월남전을 포함한 군경험으로 인해 83년 북한의 미얀마 랑군 폭탄테러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놀랄정도로 침착성과 냉정함을 유지했다. 두 대통령 모두 한·미 동맹관계를 살아 숨쉬게 하는데 일조했고, 또 이에 대한 조정능력도 있었다.
유능한 참모진들은 한국을 많은 주요 국제기구에 참여토록 했으며 한국민들은 철저한 준비와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그 곳에서도 금방 존경을 받았다. 두 대통령은 한국을 찾는 주요 방문객들을 환대했고, 장기적 관점에서 외국과의 개입정책및 상호관계의 전형을 만들기 위해 전세계를 두루 돌아다녔다.
86년 주한 외교관중 최고참이었던 프레데리코 카르나우바 브라질 대사가 장기휴가차 본국으로 귀환하자 다음 연장자였던 내가 대리 고참역을 맡게 됐다. 이 자격으로 나는 자주 주요 외국방문객이나 국가원수를 영접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일이 너무도 흔했기 때문에 나는 대사관 차가 공항까지 가는 길을 혼자서 저절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이 보다 차원높은 외교무대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됐다. 정부기능은 지구촌 경제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간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은 전세계에 80년대 한국은 더이상 「은둔의 왕국」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줬다.
임기 초창기의 한국과 임기말 한국간의 가장 큰 질적 차이는 나에게 많은 조정 역할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나 또는 지식인들간의 모임에서 불평이 터져나왔던 18홀짜리 골프코스등 미8군존재의 경우,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군 지도자들에게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는 가끔 자신의 특권은 조금도 손해보려 하지 않으면서 『천편일률적인 외교집단(외교관)』이라며 욕하는 미국 군지도자들에게는 미국측 임무에 관한 불신 분위기를 조성했다. 몇몇 군 동에게는 당황스러웠겠지만, 나는 때때로 한미야전사(CFA)의 4성 사령관을 한국인이 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곤 했다. 양국 인사는 상대적으로 무리없이 작동하던 양국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꺼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기운은 감돌고 있었다.
약 1,5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로 늘고, 미국과의 쌍무교역도 95억달러에서 360억달러로 급증한 80년대의 극적인 발전을 통해 한국인이 가질수 있었던 엄청난 자신감에서 보면, 관계재정립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최근 대화를 나눠본 한국인들은 미국이 자신을 능력없는 동생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느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예를 들어 한국신문과 시사평론가들은 94년 10월 미국과 북한간에 제네바 협정 골격이 이뤄졌고, 이것이 오만한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전달됐다고 생각했다. 한·미 양국 확대회의에서 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더라도 한국의 핵위기는 양국간에 해결돼야 한다는 비판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양국의 유연성과 타협을 요구하는 모든 현안의 목록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역조건, 시장개방, 주둔군 신분협정(행정협정), 군지휘체계의 재조정, 여권·비자취급문제, 북한에 대한 정책, 지적재산권, 희망섞인 바람이지만 북한이 품위와 예의를 요구하는 전세계적 의무를 이행하고 현명하게 개방의 길로 갈수 있도록 유도하는 재정지원 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서울과 워싱턴이 긴밀하게 협의해서 결정돼야 한다는데 우리는 동감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종속적인 하위 파트너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곤 했다.
가끔은 부적절한 논평이 폭풍우와 같은 비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 회고록 초반에 내가 언급한 것처럼 양국 언론들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과장하곤 했다. 96년 9월18일 북한 잠수함사건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워렌 크리스토퍼는 『모든 당사자들은 이같은 도발적인 행동을 더이상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적절치 않은 발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고, 언론은 미국측의 사과와 설명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도 5공화국때 가끔 말 실수를 했다. 관련된 사람들이 워싱턴의 대표자에게 신세진 것이 전혀 없다고 시위하려 할 때, 그것은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와 괴롭혔다.
우리는 98년 금융위기에 대한 한국의 대응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안한 몇몇 조치에 대한 한국정부의 초기 대응을 지켜봐 왔다. 또 한번, 자제가 요구되고 또 민감한 부분은 이해돼야만 했다. 미국이 IMF의 주요 참여국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한 반응이 반미운동으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 해왔다.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문제들은 한미관계의 복잡성을 잘 대변해준다. 그러나 과거 20년동안 구축했던 굳건한 토대가 우리에게 긴밀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는 것을 나는 줄곧 체감했다.
또 형제관계에서 동반자관계로, 생명력이 넘치고 조정능력이 있는 관계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잘 훈련받은 전문가들이 놀랄 정도로 늘어나고,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할 줄 아는 미국인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이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직면한 금융문제,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 미술·음악적 재능의 교환, 그리고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확장시키는 문제 등 모든 면에서 우리는 진정 동등한 동반자가 됐으며, 나는 이 동반자 관계가 21세기 세계에서 핵심요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황유석"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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