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5개월새 5,867명,작년 비해 12% 증가/IMF시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수속만 최장 3년·정착프로그램 부재 등/정부는 여전히 뒷짐만 지고 있다『대량 실업시대, 적극적인 해외이민 정책으로 돌파구를 열자』.국제통화기금(IMF) 시름이 깊어지면서 정부가 하루빨리 새로운 이민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난으로 실업자가 급증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이민은 더이상 도피나 낙오가 아니다. 실직자들 뿐 아니라 번듯한 직장인 사이에서도 이미 이민은 비상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올들어 총 이민자 수(5월말 현재)는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11.7% 늘어난 5,867명. 이보다 훨씬 큰폭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지금 이민을 준비중이거나 고려중인 잠재적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방관자적 자세이다. 이민을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맡긴채 뒷짐만 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92년부터 이민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1인당 이주비 한도를 점차 늘리는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해 오기는 했으나 「되도록 많이 내 보내겠다」는 차원의 개선은 아니다.
지난 96년 6월 캐나다 대사관에 투자이민 신청서를 낸 A씨. 회사와 재산을 정리하고 기다린 끝에 2년만인 최근에야 인터뷰 날짜를 받았다. 인터뷰후 신체검사를 받고 해외이주신고 등 국내 수속과 대사관 신원조회를 거쳐 이민비자를 발급받기까지는 1년 가량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민 가는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민 결심에 5∼6년 걸렸는데 수속하느라 또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며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외교통상부 재외국민영사국 이주과 김일두과장은 『선진국치고 이민을 장려하는 나라는 없다』며 『이민자들을 측면지원할뿐 특별한 이민정책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측면지원」 조차 받기 힘들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아직 선진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좁은 국토등 환경적 요인 때문에 이민을 장려할 필요가 크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제는 정부가 이민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할 시점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IMF위기가 획기적인 이민 정책 수립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술과 두뇌를 가진 실업자들을 막연한 고통속에 가둬놓지 말고 다각도의 외교적 교섭을 통해 해외에서 새삶을 개척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광규 명예교수(인류학)는 『IMF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민장려책을 펴야할 것』이라며 『실업자에게 이민국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훈련시켜 내보내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려대 윤인진 교수(사회학)는 『일본은 성공적인 이민정책을 통해 중남미에 제2의 일본을 건설했다』며 『우리나라도 세계시장을 개척, 우리 필요에 맞게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장기적인 이민정책을 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공적인 이민정책의 우선 조건은 이민자 정착프로그램이다. 사람을 내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이민자들이 정착해서 잘 살 수 있도록 끝까지 돌봐주는 교민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약 100년전 남미로 농업이민간 일본인들이 뿌리를 내려 페루에서는 대통령까지 탄생시키고 각국의 정부요직을 두루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본국 정부의 철저한 교민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민자들에게 정착금을 주고, 이들이 생산한 농작물을 구매해주는 등 다각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반면 60년대 우리의 남미 농업이민은 정부의 무원칙한 이민자 선발과 무관심등 때문에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착프로그램의 부재는 섣불리 이민결심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이미 한국 땅을 떠난 이상 본인들이 알아서 미래를 개척하라』는 정부의 이민철학으로는 본격적인 이민러시를 유도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렵게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도 까다로운 조건과 절차, 1년반∼3년에 달하는 수속기간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투자이민과 기술이민 등 이민 종류에 따라 재산, 영어실력, 학력, 기술면에서 까다로운 조건을 구비해야 하고 각국별 이민자수(쿼터)도 제한돼 있다.
비전21 해외이주공사 관계자는 『정부가 능력있는 사람은 가고, 없는 사람은 못간다는 식의 자세에서 벗어나 이민자 쿼터나 자격에 대해 외교적 차원에서 적극 교섭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에 이민정책을 담당할 전문인력이 부족한 것도 이민정책을 뒷걸음질치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현재 외교통상부에서 해외이주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5명이 전부. 이들도 순환근무 원칙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이민정책에 정통한 관료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한 이주알선업체 대표는 『공무원들이 이주업무에 대해 눈뜰만 하면 공무원들이 바뀐다』고 불평했다. 해외이주를 알선해주는 업체는 늘어나고 있으나 체계적인 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이민정책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80년대말까지 4개에 불과했던 이주공사는 95년이후 무려 29개로 늘어났으나 이중 문을 닫기 직전인 업체도 상당수. 한국국외이주알선법인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이주업체 허가는 잔뜩 내주고 감독은 전혀 안해 피해자가 속출하고 업계 전체의 신뢰도도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체계적인 이민정책의 수립을 미루는 것은 국가 자산의 효율적 활용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전문가들은 『이민자들을 국가의 소중한 해외 자산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민정책의 출발』이라고 강조한다.<남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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