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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7(문민정부 5년: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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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에서 환란까지:17(문민정부 5년:39)

입력
1998.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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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죽는다” 여론에 삼성車 허용 물꼬/‘YS 외제조깅화’ 방영에 부산시민 “고향무시” 아우성/YS,삼성 개입판단 “李 회장에게 조용히 하라 하시오”/한이헌 수석 “허용 불가피” 건의 YS “전면 재검토” 지시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서도 어김없이 조깅을 했다. 94년 11월 중순. 아·태경제협력체(APEC) 지도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호주 시드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통령의 해외방문일정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세하게 국내에 알려진다. 김대통령의 시드니 APEC 지도자회의도 마찬가지였다. 왕성한 해외활동을 알릴 목적으로 모 방송사가 김대통령의 조깅장면을 방영했다.

그런데 이 방송이 문제가 됐다. 부산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이유는 TV화면에 비친 김대통령의 조깅화. 카메라에 비친 대통령의 조깅화는 마크도 선명한 나이키였던 것이다.

부산시민들은 『부산경제가 죽어 나자빠지고 있는데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외국신발이나 신고 있으니 부산경제가 되겠느냐』며 아우성쳤다. 『부산을 살려달라고 대통령 뽑아줬더니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소동은 점차 불거졌다. 부산지역 경제인들은 『대통령이 부산지역 경제에 관심이 없어도 너무없다. 그렇게 관심이 없으니 삼성 승용차사업을 허가할 리 있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급기야 김대통령 모교인 경남고등학교 동문들까지 움직였다. 그들은 『YS가 해도 너무한다. 고향을 무시하는 사람이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시드니를 떠나 필리핀 체류중 부산에서의 소동소식을 전해들었다. 「고향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김대통령에게 충격이었다. 측근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김대통령의 「삼성승용차 불허방침」이 부산시민들을 자극하고 있으며,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위라는 결론이 나왔다.

한이헌(韓利憲) 경제수석은 『삼성 승용차를 허용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 『삼성 승용차문제가 부산지역 정서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삼성차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시오』 삼성그룹의 승용차사업 진출은 이렇게 해서 출발했다. 그때까지 김대통령은 삼성이나 부산의 5개월여에 걸친 끈질긴 요구에도 「삼성차 불허방침」을 고수하고 있었다. 심지어 삼성이 부산시민을 사업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알아 아주 못마땅해 했다.

시드니 APEC 지도자회의가 있기전인 94년 11월초. 한이헌 경제수석은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을 찾아갔다. 부산시민들이 벌이고 있는 승용차 유치요구서명을 삼성의 개입으로 판단한 김대통령의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서다. 이회장을 만나러 가기전 김대통령은 한수석을 불렀다.

『한수석, 이건희 그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자기가 자동차를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 왜 부산시민을 선동해』 『부산시민들도 공장을 유치하고 싶어합니다. 시민들은 대통령께서 공장을 끌어오지는 못할망정 오겠다는 공장을 막고 있다는 반응들입니다』 『내가 안된다고 하나. 상공장관이 안된다고 하니까 안되는줄 알고 있지. 어쨌든 이회장에게 가서 조용히 하도록 하시오』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으로 제네바에 나가있는 김철수(金喆壽) 당시 상공장관. 『반대이유는 명백했습니다. 기술자가 모자라는 상황에서 과열스카우트는 불을 보듯 뻔했고, 좁은 시장에서 벌어질 과당경쟁 역시 당연했지요. 삼성이 승용차사업을 시작하면 국내기업간 과잉경쟁끝에 국내 메이커중 어떤 회사도 세계 일류 자동차사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삼성이 일본 닛산과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한 94년 4월. 김장관은 김대통령에게 삼성승용차 불허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김장관의 말을 듣고 『상공부 뜻대로 할 것』을 지시했다. 김장관이 김대통령의 의중을 분명하게 확인한 셈이다.

김장관은 대통령의 의중을 담은 정부의 방침을 공식화하려 했으나 당시 박관용(朴寬用) 비서실장이 『부산 민심도 있으니 공식발표는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김장관은 몇몇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성차에 대한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공세를 받고 그저 웃을 뿐 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한자로 「불가(不可)」를 쓰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일부 기자들은 삼성승용차가 안된다고 판단했고, 일부는 이를 기사화했다.

삼성차를 부산에 유치하자는 여론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드높던 때까지도 김장관의 삼성불가 입장은 분명했다. 『부산여론을 감안할 때 정부가 어차피 삼성차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말이 공공연하던 94년 11월초에도 김장관의 입장은 확고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삼성승용차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판단은 청와대도 같습니다.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변하지 않을 겁니다』고 공언했다. 청와대의 분명한 의지를 담은 발언이었다.

주무부처인 상공부가 반대하고 나선데다 박재윤(朴在潤)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삼성승용차 불가」를 외쳤다. 시드니에 가기 전까지 삼성차에 대해서만큼은 김대통령을 비롯한 결정라인에 있는 관계자들 모두 한목소리였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삼성차 불허입장을 분명히 굳히도록 한 장본인은 정작 따로 있었다. 삼성측 고위 관계자. 『여론도 여론이지만 김현철(金賢哲)씨가 삼성차불허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삼성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감정을 갖고 이를 표현했다는 겁니다』 김대통령에게 삼성차 는 안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주입시킨 것은 김현철이라는 것이다.

그랬다. 김대통령과 이건희 회장은 정권초기 「개혁」이란 공동깃발을 들고 한방향으로 나아가는 듯 했으나 사실은 그리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이유는 선거자금. 삼성의 또다른 관계자. 『대통령 선거초반 김대통령쪽에서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룹에서는 최대한 시간을 늦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거 막바지에 결국 상당자금을 지원했으나 김후보쪽에서는 이를 양다리 걸치기로 판단했다고 그래요. 삼성에 대한 눈길이 고울리가 없었지요』

특히 삼성에 대한 반감은 김현철씨쪽에서 더욱 강했다고 한다. 이는 94년 11월초 이건희 회장의 발언으로 분명해졌다. 부산시민을 선동하지 말라는 김대통령의 말을 전하러 온 한이헌 수석이 이회장을 만났다. 한수석. 『승용차사업을 하려거든 논리를 개발해야지 왜 부산시민을 앞세워 대통령을 괴롭힙니까』 이회장. 『무슨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한수석. 『문어발 경영이란 비난여론이 수그러들어야 합니다. 계열분리나 사업정리 등이 있어야 여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이회장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재현(이재현·李在賢·제일제당 부회장)이를 부추겨 재산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하려고 하는 겁니다. 김현철이나 김기섭(金己燮)이 왜 집안일에 끼어듭니까』 한수석의 문어발 정리 요구가 갑자기 제일제당과 한솔(당시 전주제지) 등 삼성 관련사들과의 재산분배문제로 변질되고 말았다. 삼성의 승용차를 막는 것은 김현철이란 삼성 내부의 정보와 판단이 이날 이회장의 발언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김대통령­ 김현철라인을 주축으로 한 청와대쪽은 삼성불가 입장이었으나 다른쪽 실력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최형우(崔炯佑) 문정수(文正秀) 의원 등 부산을 연고로 한 여권의 실세들은 삼성승용차 허용을 강력이 주장하고 나섰다. 삼성의 승용차 허용문제는 어차피 정치적 판단에 맡겨질 수 밖에 없었고, 반대일색이던 청와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대통령의 조깅화사건때 부터였다.<이종재 기자>

◎삼성의 약속/중앙일보 주식매각/자동차 국민주 공모/광주·군산·대구 등 지역 특화단지 육성

삼성그룹은 94년 12월6일 상공부에 승용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제출하며 여러가지를 약속했다. 약속의 골자는 전자 기계 화학 자동차 등을 그룹의 4대 축으로 한 업종전문화와 이를 위한 계열사 매각 및 분리다.

자동차사업을 국민기업으로 운영하기 위해 흑자전환이 예상되는 2005년쯤 예상 총자본규모 1조원의 50%인 5,000억원을 국민주로 공모한다. 96년중 중앙일보가 보유중인 연포레저와 운현궁 부지를 매각해 재정자립을 다진 뒤, 총지분 72%에 달하는 중앙일보 주식(대주주 및 그룹 보유)을 완전히 매각하고 매각대금의 일부를 출연해 국내 언론인의 해외연수 등을 지원하는 삼성언론재단을 만든다.

제일모직을 종업원지주회사로 만들고 분당 서현역사는 사무실로만 활용하며 판매시설은 제3자에게 매각하거나 임대한다. 2000년께 도곡동 제2본사 사옥이 완공된 이후에는 서현역사를 완전 매각한다.

비주력 관계사인 호텔신라는 합작선과의 협의를 거쳐 계열분리 등의 추가조치를 적극 추진한다. 계열분리키로 했던 신세계와 제일제당의 완전한 법적 분리를 위해 그룹지분을 조기매각하며 파견 경영진도 조기철수한다.

전남·광주지역에 전자특화단지, 군산·장항에 중공업특화단지, 전남·여천지역에 신소재특화단지, 대구지역에 상용차전문단지를 각각 육성한다. 특히 96년부터 99년까지 대불공단에 5,000억원을 투자해 연간 자동차 100만대분의 안전유리 및 판유리, TV용 유리를 생산하는 일괄생산체제를 갖춘 대불안전유리공장을 세운다.

군산·장항에는 2조5,000억원을 들여 97년부터 99년까지 150만평을 매립, 임해단지를 조성한다. 99년부터 2002년까지 공장을 건설해 발전설비 등 플랜트류와 공작기계 등을 생산하는 기계플랜트 중공업기지로 육성한다. 목포항을 서해안의 중심항구로 개발키 위해 5,000억원을 투입, 96년부터 목포앞 압해도지구 450만평을 매립, 신항만을 건설한다. 대구·경북권에는 전기 및 수소자동차를 개발할 인력규모 1,500명의 자동차연구소를 99년까지 설립한다.

□삼성의 승용차 사업추진 일지

◆94년

·4.26 닛산과 승용차 기술도입계약 체결

·10.27 21세기 기획단 발족

·12.6 상공부에 기술도입신고서 제출

◆95년

·3.28 삼성자동차 창립

·4.26 부산 신호공단내 공장 기공식

◆96년

·6.21 부산공장 상량식

·10.1 자동차 소그룹체제 출범

◆97년

·5.12 생산설비 가동식

·10.25 시작차 20대 생산

◆98년

·1.3 양산체제 돌입

·2.17 첫차 발표회

·3.26 삼성자동차 SM5 판매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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