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감시자로 취임한지 석달/그러나 아직 목소리내기는 커녕 이사회 구경조차 못해보기도…/과연 건전한 ‘야당’인가/아니면 또하나의 ‘들러리’ 인가『석달에 한번정도 이사회를 한다더니 주주총회 이후 한번도 부르지 않던데요? 회사 소개자료를 보내온게 전부입니다. 회사에 항의를 할까, 아니면 그만둘까도 생각했습니다』
지난 3월12일 기아자동차판매의 주총에서 사외이사로 선임된 환경운동연합 최열 사무총장. 시민단체 소속 첫 사외이사인만큼 그의 활동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높았다. 그러나 취임 3개월여동안 그가 한 일은 사장과의 상견례뿐이다. 기아자동차판매는 그동안 최총장을 부르지도 않고 2차례의 이사회를 개최했다. 『아마 연락을 했을텐데…』라는 것이 회사의 해명이다.
「재벌개혁의 견인차」, 「경영 감시」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기업에 들어간 사외이사들. 대주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제3자를 이사로 선임, 총수 1인의 독단경영을 방지하고 소액주주의 이익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모든 상장사에 사외이사 선임이 의무화한지 3개월여가 지났다.
과연 사외이사는 경영진에 대한 「건전한 야당」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전위부대인가인가. 경영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이 경영보호라는 형태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가.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낯선 외부인사가 기업내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외이사제의 도입 자체가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평가한다. 비밀스럽고 담합적인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작은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0여분동안 차나 마시며 경영주가 결정한 투자나 차입계획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던 이사회가 2∼3시간에 걸친 토론으로 바뀐 기업도 있다.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이 사외이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백지화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제목소리 내기」는 커녕 이사회 구경조차 못해본 사외이사들도 많다.
지난 3월 모제약회사 사외이사로 선임된 C모 변호사는 『잘 아는 분이 하도 부탁해서 맡기는 했지만 그동안 한번도 이사회에 참석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유한양행 사외이사인 장덕순변호사는 『아직도 간단한 안건은 이사회를 거치지 않고 내부에서 서면상 결의만을 통해 처리하는 회사가 많다』며 『이 경우 사외이사는 불참한 것으로 처리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거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사외이사를 장식물 정도로 생각하는 기업도 문제지만 사외이사의 소극적인 자세 역시 이 제도의 참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연고에 의해 선임된 친경영진 사외이사일수록 「좋은게 좋다」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사외이사를 명예직쯤으로 여기거나, 단순히 이사회에만 꼬박꼬박 참석하면 책임을 다한 것으로 여기는 사외이사도 많다.
외환은행 비상근이사(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김태진 청구화공사장은 『사외이사들은 점잔만 빼느라 모두들 듣기싫은 소리는 하지 않는다. 책임감도 없고 응집력도 약해 문제가 있어도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규정은 매우 복잡한데 사외이사들의 전문성은 떨어져 경영에 대한 감시나 조언을 할 처지가 못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경영학)는 『회사밖에 있는 주주를 보호해야 하는 역할을 망각한 채 눈뜬 장님처럼 이사회만 왔다갔다하는 사외이사들이 많다』고 비판했다.
물론 사외이사가 의사결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도 있다. 이미 2년전 사외이사제를 도입한 현대종합상사의 사외이사인 고려대 어윤대(경영학) 교수는 『외제 스포츠용품을 판매하는 아웃렛 설립계획에 대해 그룹 이미지에 좋지않다고 사외이사들이 강하게 반대, 부결시킨 바 있다』고 소개했다.
외국인 주주와 시민단체가 사외이사 3명을 공동 추천한 SK텔레콤 역시 사외이사 활동이 두드러진 기업으로 꼽힌다. 사외이사인 한양대 김대식 교수(경영학)는 『사외이사 선임과 동시에 연간 100억원이상의 내부거래는 이사회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정관을 개정했다』며 『사외이사가 제역할을 하려면 이사회 권한을 강화하는 정관개정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경우 상장사는 평균 10명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으며 사외이사가 경영에 막강한 입김을 작용하는 사례가 많다. 지난 92년에는 세계 최대 자동차업체인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의 최고 경영진이 이사회에서 전격 교체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사회의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은 사외이사인 존 스메일. 90년부터 3년간 200억달러에 달하는 누적적자를 기록했던 GM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스메일의 쿠데타 덕분이었다.
내년부터는 국내 상장기업의 사외이사 수가 전체 이사의 25%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기업주가 막강한 권한을 갖고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기업풍토가 개선되지 않는한 「한국의 존 스메일」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사선임 과정부터 투명해지고 최고경영자의 생각이 이사회를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지 않는한 사외이사는 또 하나의 거수기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남대희 기자>남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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