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부터 경영진이 전권행사/오너 눈치보는 ‘요식절차’ 전락/주주권익 제대로 지킬수 있게/법적·제도적 권한확대 필요『이사회에서 정책이 결정되는 일이 거의 없죠. 상장사라고 해도 이사회는 요식절차나 다름없고 비상장사는 이사회도, 의사록도 아예 없는 게 보통입니다. 이사회를 열지도 않고 보고서를 건성으로 작성해 올리는 일도 많아요. 법적으로나 최고의결기구지 허수아비나 다름없습니다』
지금은 부도가 나 법정관리 중인 한 대기업 기조실 관계자가 털어놓은 말. 주주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경영을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이끌어야 할 이사회의 허울좋은 모습이다. 투명한 경영을 하겠다고 사외이사를 선임해 보았자 이사회 운영이 정상화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오너의 경영 독주를 막고 책임경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외이사제 도입에 앞서 이사회의 「허수아비」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대기업 계열사인 S전자는 이사회 결의사항인 사모 전환사채를 발행하면서 이사회 의사록을 위조한 혐의로 시민단체로부터 최근 고발당했다. 이사회를 열지도 않고 의사록만 만들어 32명의 이사 이름을 기명날인했다는 것이 시민단체측의 주장. 기명날인된 일부 이사들이 당시 해외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회사측은 『당시 이사들이 미리 안건을 검토한 뒤 결정권을 위임하고 도장을 놓고 출국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어찌 됐든 회사의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허술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비난은 면키 어렵다. 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도 『우리나라 기업들의 관행상, 이사회는 경영감시자의 기능을 부여한 상법상 의도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고 시인했다.
이사회가 유명무실해진 이면에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 주주들의 이익을 대표해야 할 이사 선임을 경영진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법적으로 임원 인사는 이사회나 주주총회를 거쳐야 하지만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너의 발탁으로 이사 자리에 오른 임원들이 오너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사회가 중역들의 「충성도」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H그룹 관계자의 말. 『이사 선임은 사실상 오너 맘대로다. 다른 주주들은 전혀 영향력이 없다. 오너에게 잘못 보였다가 이사 「목」이 날아가는 일도 있다』
이번에 도입된 사외이사도 선임서부터 경영진의 입김이 너무 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질적으로 주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사외이사로 추천받는 게 아니라 사회저명인사나 경영진의 측근인사를 명예직처럼 「초빙」했다는 비난이다.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도 너무 제한적이다. 신규사업 진출, 자산 취득이나 처분 등 경영의 핵심적인 사안등이 이사회 부의사항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사회가 경영진 집행부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은 것이다. 특히 재벌 계열사간의 내부 거래 등은 주주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큰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의 손에만 맡겨져 있는 상황이다. 사외이사 제도가 뿌리내기에는 한국 기업의 경영풍토가 너무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김경화 기자>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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